
그 자리에 새겨진 마음
부처 (@Siddhartha_theg)
왼손 넷째 손가락. 손가락이 시작되는 자리. 흔히들 반지를 끼는 자리. 그 자리에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열다섯 살, 한창 수업 중의 일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의 이름이 천천히 새겨지면서 화끈거렸다. 왼손잡이였던 윤은 필기도 잊은 채 교복의 소맷단을 내리고 주먹을 쥐고 다른 손으로 손을 덮어 가렸다. 그래도 왼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아이는 오른편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윤의 손가락에는 검은색의 투박한, 굵은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이름을 모두 다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찾아도 그것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윤을 보아왔던 아이들 모두 다 한 번씩은 그건 뭐냐, 하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윤은 그냥, 내가 이런 게 좋아서, 같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곤 했다. 그때 오른쪽에 앉아 있던 아이도 종종 물어보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냥 별거 아니야. 하고 어물쩍 넘겨왔다. 네 이름이야, 라고 말을 할 용기는 없었다.
갑자기 몸에 새겨진 이름이 누구의 이름인지 평생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고 평생 몸에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다들 목 뒤라든지 옆구리라든지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다고도 했다. 게다가 굳이 이름이 새겨진 사람과 남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름은 대부분 한자로 새겨진다. 새겨지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사춘기가 다 지나기 전에 발견한다는 리서치 결과도 있기는 하다. 호적에 올려진 이름과는 상관이 없는 한자도 있고 똑같이 새겨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서 더러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가까이 있지 않으면 알기도 힘드니까.
그래도 이름이 새겨진 사람을 만나면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했다. 운명의 상대를 찾는다며 각자 자신의 몸에 새겨진 이름을 인터넷 같은 곳에 공개하고 ‘짝’을 찾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운명 같은, 그런 게 느껴진다고. 윤은 그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제가 화평의 곁에 있을 때마다 그 이름 위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은 그 감각은, 말초에서부터 심장까지 쭉 한 번에 밀려드는 그 파도 같은 감각은, 운명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윤의 손가락에 새겨진 윤화평의 이름은 한자로 나타났다. 尹和平. 꼭 왼 손가락 넷째 손가락의 시작하는 마디 위로 반지처럼 둘러 새겨진 세 글자는 윤의 가슴을 자꾸만 갑갑하게 했다. 오죽하면 마음에 품은 상대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도시를 떠도는 괴담이라는 말도 있는데 왜 하필 너여서. 윤에게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 손가락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대는 날이 많았다.
공교롭게도, 아니 공교로울 것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근처에 학교가 몇 없기도 하고 학군으로 묶인 탓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일단 윤이 원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참견을 하는 부모라도 있었으면 말렸을 터인데. 보육원의 선생들은 일단 아이의 장래가 정해지면 그만이었다. 그렇다고 함께 진학한 학교가 그렇게 평판이 떨어지는 학교도 아니었고, 그 동네에서는 ?하나밖에 없지만-명문이라는 자부심도 있는 학교였으니까.
윤은 이름이 새겨지고 나면 이름 주인이 곁에 있을 때마다 그 자리가 화끈거리는 것을 잘 알았다. 꼭 그 자리에 심장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맥동하는 것 같았다. 두근거림은 곧 욱신거림으로 바뀌고 웃으며 제 어깨에 팔을 두를 때마다 윤은 손가락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화평은 친구 녀석들의 몸에 새겨진 이름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제 몸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면서. 그래서 윤은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몸에도 아무것도 없다고. 마을에서 ‘이름’이 없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작은 마을은 소문이 빨라 속 편한 사람들은 곧잘 너희 둘이 서로 인연인 게 아니냐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시간이 지나면 곧 흩어질 농담처럼 화평에게 그 이름을 보여주면서 이거 봐라, 네 이름이다. 하고 웃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온 애를 다 써야 했다. ‘야, 윤화평, 이거 볼래? 네 이름이야.’ 하면서 농담인 척, 웃겨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을 해 볼까. 이름은 왜 새겨지는 것이고 왜 네 이름일까. 하고 웃으며 장난이라도 쳐 볼까. 그래서 문득 화평을 부르고선 아니야, 하고 웃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화평은 나이도 같으면서, 젊은 놈이 이렇게 실이 없어. 하고 픽 웃고는 했다.
하지만 윤은 그 뒤로 찾아올 제 슬픔이 싫어 생각을 접는다. 구깃구깃 접어 생각의 쓰레기통 깊숙이 넣어둔다. 줏대 없는 마음은, 쓰레기통에 넣자마자 다시 꺼내게 된다. 언젠가는 그렇게 말을 해야지, 하면서 윤은 혹시라도 먼지가 묻었을까 봐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쉬어 생각 위로 다른 생각이 앉지 못하도록 털어냈다. 씻을 시간이다.
---
상용시로 진학이 결정 난 윤을 보고는 화평도 나도 그 동네로 갈래, 해서 지금은 둘이 같이 살면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그러니 이제껏 둘이 알고 지낸 시간을 햇수로만 따지면 15년이 조금 넘는다. 그런 관계를 소꿉친구, 불알친구, 부르는 말은 많지만 윤은 그런 말로는 화평과 묶인 적이 없었다. 알기는 오래 알았지만 친구라는 말로도 묶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이름으로 화평을 부르는 것은 상상해 보지 못한 탓에 늘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윤의 작은 습관이었다.
같이 산다, 말이 같이 사는 것이지 얼굴 마주치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다. 윤은 처음에 조금 걱정을 하기도 했다. 저와 화평의 성정이 확연히 다른 탓에 삐걱거리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화평은 겉으로야 활발하고 능청스러운 아이였지만 그 아이도 지나온 시간이 평탄치만은 않았던 탓에 가끔 그 밤바다처럼 고요하게 요동치는 파도 같은 시선은 윤의 마음을 늘 일렁이게 했다. 화평의 연한 눈동자 안에서 시작된 조석 현상은 결국 윤의 마음에 들물을 가득 채우고 저는 날물이 되어 빠져나갔다. 그 시선 한 번으로도 화평은 윤의 손가락에도 마음에도 그렇게 간단하게 저를 묶어 놓았다. 그러니 혹시라도 들키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파도처럼 윤을 덮쳐왔음에도 그 얼굴에 대고 싫다는 말을 못 했다.
윤이 그렇게나 염려한 것이 부끄럽게도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화평의 얼굴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단은 학교가 다르기도 했고 저도 생각 이상으로 바빠 어쩌다 마주치는 화평의 얼굴은 늘 자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최윤은 가끔은 집에 혼자 있을 때면 편하게 반지를 벗어 놓을 수도 있었다. 두꺼운 반지는 윤화평의 이름 석 자를 다 가릴 수 있는 녀석이어서 반지를 벗어 놓고 제 왼손 약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입술이 그 손가락 위에 새겨진 화평의 이름 석 자 위로 향했다.
가끔 화평은 윤의 손가락을 다 가릴 것처럼 굵은 반지에 시선을 주기도 했지만, 특별히 그게 무어냐 묻는 일은 없었다. 윤은 사실 그 반지가 있는 자리 밑으로 윤화평의 이름이 욱신거릴 때마다 화평의 눈이 꿰뚫을 듯 그 자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야, 최윤. 근데 그거 뭐냐, 너. 전부터.”
오랜만에 한가한 일요일, 햇빛이 잘 들이치는 자리에 누워 온몸으로 볕을 받고 있던 화평이 문득 생각난 듯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있는 윤의 쪽으로 시선을 확 돌리며 물었다. 윤은 제 손가락에 자리하고 있는 투박한 검은 반지를 보더니, 아, 이거. 하고 대답했다. 그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을 부디 화평이 모르기를 바라면서 어설프게 씩 웃어 보이고는 그런다.
“그냥 하고 다니는 거야.”
그래, 하고 화평이 혼자 중얼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한참 햇빛을 받고 있었던 때문인지 그에게서는 잘 말린 빨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한 번 보면 안 되냐.”
“왜?”
윤은 저도 모르게 왼손을 슬그머니 뒤로 뺐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던 화평이 제 한쪽 손목을 들어 보였다. 희미하게 뭐라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은 알았지만 무슨 글자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쪽으로 윤의 시선이 가는 것을 눈치챈 화평은 얼른 한손으로 손목을 덮으며 그러는 것이다.
“나, 이거 방금 새겨졌거든. 나도 보여 줄 테니까, 너도 보여줘.”
“뭐, 뭘 보여줘.”
“이름이잖아.”
화평은 전에 없이 단단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어떤 이름인지도 알아. 물음이 되지 못한 말들이 윤의 마음에 어지럽게 쌓였다가 무너졌다. 혹시라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나갈까 싶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을 흔들리는 눈으로 화평을 바라보았다.
“싫, 어….”
윤은 손목시계를 찬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덮고 화평에게서 등을 돌렸다. 화평의 손목에 이름이 새겨졌다. 누구의 이름이든 그게 누구든 이름만 가지고 평생 타인을 미워하고 질투하며 사는 것도 싫고, 제 손가락에 새겨진 이름이 오늘따라 유독 화끈거리는 것도 싫었다. 마치 보여줘 버리라고 말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화평은 흘끗거리면서 제 눈치를 보는 룸메이트를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먼저 말하기 싫으면 내가 먼저 할게.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하고는 걸음을 두어 번 걸어 다시 윤의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러더니 가렸던 오른 손목을 확 걷어 윤의 앞에다가 보였다.
閏.
성도 없이 한 글자만 달랑 새겨진 글자는 눈으로 보기에도 그 자리가 뜨거울 것 같이 보였다. 갓 새겨진 이름이 이렇게 뜨거운 것이던가. 성도 없고, 한자도 틀리고. 윤은 당연히 제 이름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화평을 보며 묻는 것이다.
“이름, 이제 생긴 거야?”
그 말을 들은 화평은 잠깐 생각을 하는 것처럼 시선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한 번 굴리더니 이내 윤의 얼굴을 한 번, 제 손목에 새겨진 윤 자를 한 번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린다.
“이름은.”
“어?”
한여름인데도 긴 소매 셔츠를 입고 있던 화평이 왼 손목을 걷었다. 그리고는 양 손목을 함께 내밀어 보여주면서 씨익 웃는 것이다.
“최 씨인 건 전부터 알고 있었어.”
윤은 손에 힘이 턱 풀려 양손을 모두 내려놓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나일 리가 없다는 생각만 드는 것이었다. 제 이름이 최, 윤, 인데도 화평의 손목에 새겨진 최, 윤, 과는 다른 이름 같았다.
화평은 윤의 손을 들어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 그래놓고는 그 이름을 확인하기가 무서워 눈을 질끈 감는다. 언젠가부터 갑갑하게 두꺼운 반지를 하고 다니더라. 이름을 가릴 수 있는 밴드 같은 걸 써도 될 텐데 꼭 이걸 끼고 다니니 가끔은 진짜 애인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되고는 했다. 그것은 또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인 것이다.
화평은 그것이 제 이름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남의 이름이더라도 괜찮다. 윤의 곁에 그 사람이 오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이고, 설사 만나더라도 정말 그렇게 운명을 느껴 그 사람에게로 영영 가 버린다고 해도 괜찮았다. 제 마음이 제 몸에 새겨진 것만 그가 알면 된다고 생각했다.
“눈, 떠야 보이지.”
윤의 목소리 끝이 슬쩍 젖어 들었다.
윤화평.
제 이름이다. 화평은 그 자리에 새겨진 것이 제 이름인 것을 보고서는 눈이 동그래져서 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깨만 으쓱하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것이 꼭 어릴 적에 우리 커서 결혼하자, 하고 말을 했을 때와 같이 고운 색이었다.
“있잖아, 최윤.”
“응.”
“너도 그래?”
윤은 화평의 손목에 흘끗 보이는 제 이름을 보았다. 최, 윤. 그 이름이 제 이름인지 자신은 없었지만,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윤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내뱉는다.
“뜨거워. 네 이름.”
화평의 입술이 제 이름자 위로 내려앉았다. 가볍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소리가 쪽 하고 나는 동안, 아플 만큼 뜨거웠던 자리가 천천히 다시 제 온도를 찾았다. 서로의 손을 와락 붙들고 이마를 맞대면 가까이서 시선이 엉켰다. 화평의 입술이 자꾸만 가까이 다가왔다.
“왜, 자꾸.”
“하자, 뽀뽀.”
“싫어. 부끄러워.”
“아, 왜. 내가 이걸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는 얼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부끄러웠다. 저는 이렇게 얼굴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화평은 조금 달리다 온 것처럼 상기 된 것이 전부여서 왠지 억울했다.
윤은 그렇게 가까이서 한참을 시선을 얽으면서 생각했다. 온 신경이 간질거리고 심장으로 피가 몰려오는 이 감각은, 말초에서부터 심장까지 쭉 한 번에 밀려드는 이 파도 같은 감각은, 역시 운명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