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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노넴 (@STG_no__name)

[TIMEVERSE]


| 사람들은 태어나면 팔목 쪽에 100이나 1이 새겨져 있다. A와 B가 파트너라면 A는 100. B는 1이 적혀져 있고 파트너끼리는 같은 숫자로 시작하지 않는다. 파트너들은 서로 스쳐 지나갈 때마다 각자의 숫자가 1씩 늘거나 줄어든다. 100이 1이 될 때까지, 1이 100이 될 때까지 서로를 못 알아차리면 사망함으로, 그 안에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서로 파트너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숫자가 50으로 조정이 된다. 50으로 조정된 숫자는 서로 마음이 식거나, 멀리 오래 떨어져 있으면 숫자는 두 사람 다 줄어들기 시작한다. 줄어든 숫자는 신체접촉이나 관계로 다시 충전이 가능하다. 파트너가 죽으면 남아있는 사람의 숫자 50은 49로 줄어들고, 하루에 1씩 숫자가 줄어들다 49일 후, 사망하게 된다.
+ 보통의 숫자가 새겨진 사람들은 각성을 통해 숫자가 새겨진다. 각성의 시기는 19세에서 20세로 넘어가는 때로 사람마다 더 일찍이 거나 더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파트너를 빨리 만나지 못하면 파트너들끼리 서로 스쳐 지나가지 않더라도 두 달의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숫자가 늘거나 줄어든다. A는 각성 B는 각성하지 않았을 경우 A는 B를 만나더라도 숫자가 늘거나 줄어들진 않지만 두 달의 시간이 지나면 숫자가 늘거나 줄어든다. 즉, 파트너의 각성이 없다면 두 달의 시간이 지나 숫자가 카운터 되는 것 외엔 모두 적용되지 않는다.
++이들 중 일부는 신체 어느 부위에 또 다른 숫자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과거 파트너끼리 전생에 연인으로 맺어진 횟수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이 숫자가 나타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한참을 잠을 자려 이리저리 뒤척이던 것을 포기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제법 길어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대충 한손으로 쓸어넘겼다. 침대 옆에 놓인 미니 테이블 위의 시계는 정확히 새벽 2시 57분이라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터지는 한숨을 막을 길은 없었다. 요즘은 자꾸 그랬다. 잠이 오질 않아 도중에 항상 잠이 깨 멍하게 앉아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깜깜한 새벽의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렴풋이 방안의 풍경이 보였다. 가만히 앉아있던 그는 몸을 일으켰다. 차분한 발걸음으로 거실로 나온 그는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내려 드넓은 통유리로 막혀있는 테라스 앞에 와서 섰다. 바깥이 어두워서 그런 걸까, 가끔 야경이 보이는 것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품이 조금 큰 새하얀 니트와 그것에 맞게 새하얗기만 한 면바지를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은 표정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모습이 익숙하기도 하다가, 익숙하지 않기도 해서 그는 자신의 모습에서 꽤 생소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던 그는 손을 새삼스레 뻗어 뒷목의 맨살을 쓸었다. 샤워할 때 가끔 확인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목덜미에 검고 굵은 글자로 1이라고 써진 숫자를. 그리고 그대로 손을 내려 머그잔을 쥐고 있는 왼쪽 팔의 어느 부분을 꾹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곳에도 새겨진 숫자를 알고 있다. 그는 손을 손목까지 미끄러트리며 내렸다가 니트 소매의 끝부분을 잡아 올리며 다시 천천히 올라갔다. 아까 그가 꽉 붙잡았던 그 부분까지 올라가자 선명하게 새겨진 숫자. 그는 그 숫자를 저도 모르게 소리 내서 불러보았다. 그러니까, 

"29."

남은 기회가 아직은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회를 시간의 단위로 환산했을 때도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그 역시 미지수였다. 

 

우리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을까. 사람들이 자주 하는 그 말은 진심으로 전생의 인연이 궁금해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만큼 우리는 인연이고 운명이라는 말을 하기 위한 초석에 불과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볍게 내뱉는 그 말이 그에게는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는 말이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하였는지도 몰랐다. 아주 아주 먼 옛날의 과거.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낮고 깊은 기억의 조각을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안고 있는 그에게 전생의 인연이라는 것은 반드시 찾아야만 하는 어떤 절대적인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수많은 영겁의 세월을 다른 이름과 얼굴, 성별, 성격으로 걸어왔던 그는 이번 생에서 남아있는 단 71번의 기회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단 한 번을 만난 인연을 찾아야만 했다. 미국 이름 마테오, 한국 이름 최윤으로 이생에 다시 태어난 그는 그것이 삶의 목적이고 존재 이유였으니까.

 

 

1, 29 
:: Where are you? 

 

 

 

기억이라는 건 절대적이지가 않다. 기억은 절대적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아는 만큼만 기억하고 인식하게 된다. 기초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영유아기 시절의 기억들이 희미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무엇이 기준이 되어 내 머릿속에 남아 기억이 되는지 그 기준이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유치원생 즈음의 나이가 되면 또래 친구들이 많아지는 만큼 생각할 것도 기억해야 할 것도 영유아기 시절보다는 훨씬 더 늘어간다. 그렇게 자라 소년이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이 청년이 되며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면서 기억은 계속 머릿속에 축적되어간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게 불필요한 기억들은 버리게 된다. 그래서 내게 남아있는 그 기억들을 사람들은 추억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추억과 기억이라는 단어는 같은 단어인지도 몰랐다. 아니, 기억을 계산하는 단위가 추억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이던, 추억이던 어쨌든 내 머리에  남아있는 단편적인 잔상들은 아주 오래된 것일수록 소소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당시에는 분명 세상 모든 것을 흔들듯 휘몰아치는 가장 큰 감정인데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은 덤덤해지고 그저 그땐 그랬지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만든다. 만들어진 시간이 짧은 잔상은 생각할 때 그 감정이 꽤 강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감정과 시간과 기억은 미묘하게 비례한 관계였다. 그러나 그 미묘하게 비례한 관계들이 무색할 만큼, 윤에게 과거의 기억을 꺼내며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강렬했다. 물론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랬다. 특히 자신의 기억에 아주 강렬하게 남아있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면 더더욱.


결국 잠이 완전히 깨어버린 윤은 늘 그렇듯 잠을 포기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는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항상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렸다. 윤은 남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과거와 기억들을 글로 써 내려갔다. 사람들은 윤의 소설을 생생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내 옆에서 직접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문체가 어우러진 소설이라고 평가했고 좋아했다. 제법 여러 사람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며 냈다 하면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화제가 되는 정도의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처음 윤은 사람들의 그런 반응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글이 그렇게 유명해져서 널리 퍼지면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을 더욱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사람이 그것보고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윤은 요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글을 쓰고 있었다. 


희미하게 비추는 노트북 화면의 빛으로 인해 윤의 얼굴에 깊게 음영이 졌다. 윤은 노트북 자판을 하나하나 누를 때마다 왜인지 울고 싶어졌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그를 떠올리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

 

불행하고 기구하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 정도가 되려나. 사실 그렇게 기구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화평은 또래보다 가진 것이 없었다. 집도, 돈도, 가족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몸뚱아리 하나뿐. 그래서 화평은 그것을 마음껏 쓰기로 했다. 닥치지 않고 가리지 않고 몸을 나눴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인생 몸뚱아리 하나 남들과 나누어 쓴다고 문제가 될 게 있겠느냐 싶은 거다. 그러나 화평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화평의 나이 서른둘. 사랑이란 감상에 빠져 지낼 나이는 지나기도 했지만, 아예 사랑이란 감상에 멀지도 않은 나이이기도 했다. 


본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화평의 주변 모두가 사랑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마음 깊은 사랑보다,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보다 한순간의 쾌락을 좇고, 그것을 나누는 것. 지금 당장만 행복하면 그만인 사람들. 화평은 딱 그 경계에서 관망하는 태도를 가지고 지켜볼 뿐이었다. 그 안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들어갔다 다시 잠깐 나오는. 윤화평의 인생은 그랬다.


그렇게 사랑을 믿지 않는 화평이 운명을 믿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디를 가나 사랑, 사랑, 사랑. 노래도, 책도, 드라마도, 영화도. 모두 다 사랑 타령이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일까. 그냥 한순간의 쾌락이나 좇는 게 더 나은 것 아닌가? 화평은 주변에서 사랑으로 결말이 좋았던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런 모습 때문이라도 정말로 사랑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윤화평은 제 왼쪽 손목 위로 드러난 누군가의 이름이 너무나 싫었다. 

 

언제부터인지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것은 화평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나타난 손목 위의 이름은 화평도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그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이름에 자신이 믿지 않았던 사랑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고. 그 사랑에 아파하고 화를 내고 속절없이 흔들리고 말 것이라고. 윤화평은 그러니까, 그게 가장 싫었다. 그렇게 믿지 않았던 사랑이 꼭 비웃듯 너는 누구보다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그 오만함이.

 

*****

 

너는 나를-!!! 제 어깨를 아프게 부여잡고 귀가 찢어질 듯이 악을 내뱉는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가까이서 외치는 것인데도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쳐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를 아프게 옥죄던 손에서 힘이 풀렸고 누군가 발밑으로 고꾸라진다. 바닥은 빨갛게 물들고 채 눈도 감지 못한 누군가는 무엇인가 뚫어지게 보며 말한다. 너를 저주할 거야. 너를 원망할 거야. 너는 평생, 나를 떠올리며 괴로워할 거야. 


아아,
그래.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는. 그래서 나는,


번쩍하고 눈을 뜬 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옆 좁은 탁자 위의 시계는 오전 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윤은 한참을 들 줄 몰랐다. 이 악몽은 꽤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오던 것이었다. 윤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이 얽매인 운명의 그것. 과거의 저주였고, 운명의 속죄였으며, 인연의 쓰디쓴 그리움이었다. 그렇게 죽어버리고 기억을 거듭하며 생을 반복적으로 살아온 윤은 언제고 어느 때고 그 악몽을 꾸었다. 악몽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의 어느 부분. 그건 윤이 온몸에 표시된 자신의 인연을 찾고 싶은 이유이기도 했다.


다시 만난다면 어떤 것들을 하고 싶을까. 사실 이것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딱 한 가지 하고 싶었다. 미안했다고. 정말 미안했고.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거짓은 없었다고. 그것만 알아달라고. 그 말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윤은 더더욱 만나고 싶었고 만나야만 했다. 그것은 지금 받는 벌의 근원이었고 그래야만 속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겪었던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살아가면서, 지내면서 머릿속에 기록된 기억들은 마치 컴퓨터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듯 그렇게 지워진다. 그래도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언제든지 그 기억이 복구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쓰레기통으로 향한 기억들은 당사자가 복구시키지 않으면 영원히 그곳에 묻혀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결국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것의 기억에는 분명 전생의 기억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 사람들이 모르는 것일 뿐.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환생하여 다시 태어난 인간들의 기억 공간은 새로 살아갈 삶과 관련된 기억들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생의 기억은 기억의 쓰레기통에 남겨져 있거나 혹은 복구도 되지 않게 아예 삭제를 시켜버리는 경우가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에 속한다. 쓰레기통까지 말끔하게 비워낸 기억의 공간으로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들이 사람들의 전생 기억을 지우게 한 것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전생의 기억은 사실 품고 있기엔 너무 무겁고 힘든 것이라 신들은 너무도 사랑하는 인간들을 위해 환생할 때는 전생의 기억을 모두 지울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들도 예상하지 못한 모든 예외의 변주는 있기 마련이라 환생한 인간 중에서 간혹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이들도 볼 수 있는데 그래도 그들은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드문드문 단편적인 기억으로 하나둘씩 보이는 것이 다였다. 그걸 보통의 사람들은 데자뷰라던지, 꿈이라던지 부르고 있을 뿐.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모든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품고 지내는 인간은 사실상 없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윤은 그 보통의 범주에서 아주 크게 벗어난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윤은 자신의 모든 전생의 과거를 기억하고 또 품고 있다. 남들과는 다른 기억의 용량을 가진 것이다. 그 무겁고 힘든 전생의 모든 기억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러나 윤은 그 가혹한 운명에 대해서 항변할 수가 없었다. 그건 윤이 벌인 일에 대한 벌이었으며 그 벌은 신께서 용서하기 전에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기 때문이었다. 인과응보. 윤은 환생을 거듭하며 살아온 생에서 그 말만큼 믿을 수 있는 말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만큼 힘든 것인지도 몰랐다. 단 하나의 인연을 만나는 것이.
왜냐면 그 역시도 지금 신이 내린 벌을 받고 있으니까.

 

*****

 

귀를 시끄럽게 하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화평은 막상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끌 생각도 않고 멍하게 누워 눈만 느리게 끔벅였다. 또다-. 화평은 느리게 깜빡이던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방금 꾸었던 꿈이 잔상이 되어 눈앞에 그려졌다. 


밝은 하늘, 꽃들이 가득했던 정원, 물이 흐르는 소리, 손에 잡고 있던 피가 묻은 길고 무거운 칼, 그리고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누군가의 따뜻한 손. 화평이 늘 꾸는 꿈에서 늘 나오는 장면들이었다. 화평은 다시 눈을 떴다. 마치 직접 겪은 듯 생생한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꿈들은 화평이 18살이 되던 해에 부쩍 늘어났다. 그전에도 여러 번 꾸었던 꿈이긴 하나 그때는 이다지 생생하지도 않았고, 또렷하지도 않았다. 늘 잠에서 깨어나면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찝찝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도 반복적인 꿈을 계속 꾼다. 


하도 자주 꾸다 보니 이제 그 꿈의 풍경은 손으로 쓱쓱 그릴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자신이 잡고 있던 누군가의 손은, 그 누군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화평은 그 꿈을 꾼 날이면 항상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서 제 꿈을 곱씹었다. 그 꿈을 꾼 날이면 이상하게 기분이 울적했다. 무엇보다 이름이 새겨진 왼쪽 손목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욱신거리는 손목을 꾹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화평은 제 옆에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사람을 한번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만났던 사람이었다. 화평이 아낌없이 나누는 몸정을 좋아하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누군가. 화평은 그를 그대로 두고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어내었다.


화평이 욕실에서 나오자 그가 잠에서 깬 건지 시트를 끌어 올리고 언제 일어났냐 물었다. 그냥, 아까. 씻고 나가. 나도 일 있어. 화평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화평보다는 조금 오래 씻고 나온 그는 머리만 대충 말리고 화평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텅 빈 집에 다시 오도카니 홀로 남겨진 화평은 그 적막감이 익숙했다.


라면으로 대충 아침 겸 점심을 때운 화평은 옷을 챙겨입고 집 밖을 나섰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울려대던 전화를 무심히 받았다. 어 왜, 간다니까. 아우, 알았어, 알았어.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서둘러 통화를 끝낸 화평이 시내로 빠져나왔다. 버스를 타기 위해 큰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꿈을 꾸지 않은 한 욱신거리지 않던 왼쪽 손목의 흔적이 욱신욱신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마치 전기가 오르듯 찌릿하고 아프기까지 했다. 화평은 최대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아픔을 떨쳐내려 해보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 신호가 바뀌었고 화평이 걸음을 옮겼다. 화평이 완전히 길을 건넜을 때 왼쪽 손목부터 퍼지던 고통이 사그라들었다. 화평은 왼쪽 손목을 슬쩍 확인했다. 역시나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왼쪽 손목의 이름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각, 화평이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 건너편에서는 윤이 출근을 위해 편집자의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평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 윤의 앞에 차가 도착했고 화평이 건너편에 닿기도 전에 윤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은 그렇게 어긋났다. 

 

*****

 

이름과 이름이 이어진 이들이 종종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이름으로 상대를 찾아낸다. 이름과 이름이 연결된 이들을 소울메이트라고 칭한다. 자신과 연결된 이름이 발현되는 시기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으며, 이름이 발현될 때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화평의 경우는 후자였다. 고통도 없이 어느 순간 어느 틈에 왼쪽 손목에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과 이름이 이어진 경우는 그렇게 많은 경우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제 이름의 상대가 궁금해 찾아 나서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가 이름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큰 리스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큰 부작용은 있지만 이름을 지우는 수술은 언제든 가능했고, 그것마저 귀찮은 사람들은 전용 밴드를 사 이름을 가리기도 했다. 그것은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족쇄가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운명이 선택하는 일이었고, 그저 그 운명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애초에 화평은 그 모든 것이 상관없었다. 이름과 이름이 이루어지든 말든, 화평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 상대를 찾고 싶은 마음도 눈곱만치 없었다. 운명이 사랑을 믿지 않는 저를 비웃듯 이름을 새겨넣었더라도 화평은 절대 그 운명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었다. 일부러 엿 먹으라고 너는 내가 던져준 굴레에 굴복하듯 사랑에 울고불고 매달리게 될 거라고 말하는 운명에 화평은 대놓고 욕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좆 까 시발-.


사랑, 그딴 거 필요 없어.

 

꿈을 꾸고, 왼쪽 손목이 시큰거릴 때마다 화평은 이를 악물었다. 정해진 운명 따위 사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생각은 변함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제가 꿈에서 보았던 그 장면을 생생히 묘사한 책을 읽기 전까지는.

 

*****

 

윤은 새로 발간된 자신의 신간 표지를 무의미한 손짓으로 쓱, 쓸어내렸다. 윤과 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었던 편집장이 윤의 앞으로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내밀었다. 윤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머그잔을 받았고 편집장은 윤의 맞은편에 앉아 호록, 하고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이번엔 반응이 좀 심상치 않아요."
"어떤데요?"
"그 요즘 유행하는 로팬스판타지 소설 같다고 되게 좋아해요. 독특한 느낌이라고."
"그런가요?"

사실 그런 거 의도한 건 아닌데. 윤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커피와 함께 꿀꺽 삼켰다. 편집장은 윤의 책을 슬쩍 보고 입을 열었다. 그 묘사가 다른 때에 비해 더 생생하더라고요? 내가 읽는데 진짜 존재하는 장소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 윤은 다시 작은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아직 매니지먼트 이런 거 전혀 없죠?"
"네."
"혹시 내가 추천해줘도 될까? 지금 반응 보면 이제 곧 베스트셀러 작가 될 거 같은데 그러면 이리저리 불려 다닐 거 아니에요. 스케줄 관리해줄 사람도 있어야지."
"저 그런 거 불편해하시는 거 알잖아요."
"그래도. 언제까지 혼자일 순 없잖아요."
"괜찮아요. 소개 안 해주셔도 돼요."

윤이 한사코 거절하자 편집장은 입맛을 다시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아니 사실은, 그쪽 매니지먼트에서 최 작가님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아서 내가 소개해주려고 했지. 거기 매니지먼트 생각보다 크고 괜찮은 데라서. 나는 최 작가님이 케어 잘 받았으면 좋겠다 싶어서 겸사겸사 그런 거거든요. 저 생각해주시는 마음 잘 알죠. 근데 저는 오히려 그런 거 불편해서 제가 되레 폐가 될 거예요. 뭐 성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좀 아쉽네. 좋은 기회인데. 생각해주신 것만으로 너무 감사드리는걸요. 윤은 잔잔히 짓고 있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진심을 전했다. 그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아는 편집장은 아쉽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 마무리하기로 했다. 


편집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던 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저 가볼게요. 편집장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에게 인사했다.

"어 잠깐만, 최 작가님!"
"네?"

책 가져가야죠. 책. 편집장이 건네주는 자신의 책에 윤은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책을 받아들었다. 편집장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짜 잘 가요. 윤은 편집장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후 편집장실을 나섰다. 편집장실을 나서자 쏟아지는 인사에 모두 답해주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윤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서야 눈을 꾹,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막혀왔던 숨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깨가 무거웠다. 고작 책 하나를 들고 있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윤은 큰 돌 하나를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목울대가 울렁거리며 가만히 있지 못했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윤은 눈을 뜨고 엘리베이터에서 벗어났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대놓은 차를 쉽게 찾은 윤은 조수석에 자신의 가방과 책을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하려는데 마치 누군가 바늘로 찌른 것처럼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윤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랫동안 울어야 했다. 어쩌면 바늘로 터진 것은 눈물이 아닌, 물기 가득한 마음인지도 몰랐다. 그 마음에 담겨있던 물이 이제야 터져 흘러나오는 것은 아닐까. 윤은 흐느끼게 울면서 겨우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디 있어요."


지금 당신 어디 있어요. 윤의 궁극적인 물음이자, 조수석에 놓여 있는 이번  책의 제목이었다. 지금 당신 어디 있냐고.

 

*****

 

인생의 터닝포인트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 터닝포인트는 더더욱 극적이고, 기적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터닝포인트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일 수 있으나 그것 말고 쓸 수 있는 표현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Where are you?


요즘 화평이 읽고 있는 책이자, 터닝포인트였다.

 

아주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다. 주변에 시간을 나누고 정을 나눌 사람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던 화평은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저를 찾아온 누군가와 의미 없는 몸정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의미 없이 몸정을 나누는 사람 중 하나인 사람이 추천해준 책이었다. 나, 요즘 읽는 책이 있거든? 허, 네가 읽는 책이 있어? 소설책은 자주 봐. 어어-. 그래? 아유, 아무튼 들어봐. 내가 요즘 읽는 소설책에 나오는 인물이 딱 너 닮았어. 그게 발단이었다. 나와 닮은 소설책의 주인공.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인데 왜 이번엔 그러지 못했던 걸까.


화평은 그 이유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화평의 직감은 간혹 화평 자신도 무서울 만큼 정확했는데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화평은 그 책을 추천받았다. 작가의 이름과 책 제목을 알게 되고 곧장 서점에서 그 책을 구매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다. 널리고 널린 흔한 사랑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책이라고 생각했다. 더럽게 재미없네. 화평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마 책을 덮지 못했다. 저와 닮은 등장인물 때문은 아니었다. 재미가 없는데 이상하게 계속 눈길을 끌었다. 너무나 생생했고, 이상한 소름이 온몸에 돋았다. 그렇게 한참을 읽다가, 반복해서 꾸는 꿈의 장면을 정확히 묘사하는 대목을 읽었을 때가 되어서야 화평은 책을 덮었다. 하얗고 푸른 표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풍경 같아 보이는 그 표지에 새겨진 책 제목과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작가의 이름. 마테오.

욱씬-.
손목이 또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

 

재회를 기다리는 사람은 늘 그 재회를 기다리며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내가 다시 너를 만난다면 그때는 이 말을 꼭 할거고, 이렇게 행동할 거야. 하고.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세상은 언제나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며 머릿속에 수천번이고 수만번이고 그렸던 그 재회가 막상 눈앞에 닥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게 사람이었다. 그건 오랜 생을 걸쳐 재회를 꿈꿔왔던 윤이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회였다.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주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운명은 지독히도 장난스러웠고 신은 여전히 윤을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편집자에게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다.

-작가님? 어, 사실 얼마 전에요 어떤 분이 작가님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요. 책에 관해서 물어볼 게 많다고 하던데, 일단은 제가 작가님한테 물어본다고 하고 연락을 끊었는데 만나보실래요?
"저랑 이야기요?"
-예. 책을 재밌게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목소리 들어보니까 작가님이랑 비슷한 또래 같던데요?

최윤은 잠시 고민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만나볼게요. 편집자는 금방 목소리를 높여서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날짜는 제가 합의해서 알려드릴게요. 편하신 날짜가 언제예요? 저는, 그냥 아무 때나 다 괜찮아요. 네, 그러면 제가 날짜 합의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릴게요. 네. 전화는 그렇게 끊겼고 윤은 그 만남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은 것을 약 3일 후 집으로 찾아온 이로 인해 아주 후회하게 된다.


변함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그 얼굴 그대로였다. 그나마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그래. 조금은 눈에 경계심이 가득하다는 것. 그리고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는 것. 물론 기억 속의 옷과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달라져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사실 판단하기는 조금 어려웠다.

"이 책, 당신이 쓴 거 맞아요?"

제게 물어오는 목소리도 변함이 없어서 윤은 입안의 여린 살을 힘껏 깨물어야 했다. 치아 사이로 피의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여린 살이 씹혀 상처가 났음에도 윤은 그것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책, 어떻게 쓰게 된 거예요?"
"그, 이름. 이름이 뭐예요?"

화평은 대답 대신 자신의 이름을 묻는 윤을 보며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내렸다. 윤화평이요. 윤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황급히 뒤를 돌았다. 안으로 들어와요. 앉아서 편안하게 이야기 들어요. 빨갛게 달아오른 눈동자를 꾹꾹 눌러 숨기며, 물기 젖은 목소리를 크게 소리 내 숨기며 윤은 그렇게 사무치던 단 하나의 사람과 재회했다.

 

*****

 

화평의 앞에 막 내려진 커피가 놓였다. 미안해요,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커피 말고 줄 게 없네. 윤의 말에 화평은 대충 고개를 저었다. 별로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화평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책을 윤의 앞으로 내밀었다. [Where are you?] 이번 신간이었다. 윤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화평은 윤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책에 시선을 두며 아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물었다.

"이 책, 당신이 쓴 게 맞아요? 맞는다면 어떻게 쓴 거예요?"

윤은 다시 올라오는 울음을 꿀꺽 삼켜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쓴 거 맞고, 그건 내가 어떻게 쓴 거냐면. 입을 열고 윤은 잠시 말을 끊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가다듬던 윤이 대답을 기다리는 화평에게 말했다. 자신의 말을 화평이 이해할 줄 알았다.

"내가 겪었던 일이니까요."
"겪었다고요? 당신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윤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평이 다시 책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사람을 두고 장난하나. 화평의 반응에 놀란 건 되려 윤이었다. 왜 그러는 걸까. 다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거지? 윤은 화평을 만나서야 화평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책의 내용이 궁금했으니까. 진짜 나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러니까 윤은 한 가지 사실은 깨닫지 못한 거다. 아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윤 자신과 다르게 화평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전혀 남아있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전생 기억이 모조리 남아있으니 화평 역시 그러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큰 오판이었다. 


신은, 그렇게 관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장난하자고 온 거 같아요? 그런 말이나 들으려고?"
"아니, 그게 무슨."
"내가, 이 책에서 주인공들이 산책하는 꿈을 꿔요. 그 배경이 이 책에서 묘사하는 거랑 똑같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겪은 게 맞,"
"아아- 겪었다고?"

명백히 비꼬는 말투였다. 윤은 떨려오는 손을 부여잡으며 진정시켰다. 화평은 여전히 화난 얼굴이었고 윤은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화평은 책을 바닥에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괜한 시간 낭비를 했네. 그쪽도 그런 거 같고요.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가려는 화평을 윤이 붙잡았다. 잠깐만요. 잠깐만.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그리고 처음으로 화평과 윤은 눈을 마주 보았다. 


마주 본 윤의 눈은 울음을 참느라 눈가가 붉어진 채였고 눈 속에는 눈물과 그리움, 죄책감, 반가움,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정말, 내가 기억이 안 나요? 울음을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윤에게 화평은 차갑게 대답했다. 네, 기억 안 나요. 그리고 화평은 윤이 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는데 그 손이 하필이면 왼손이어서, 하필이면 왼쪽의 이름이 윤에게 보였다. 윤은 놓칠뻔한 화평의 왼쪽 손목을 꽉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이 이름. 이거 내 이름인데."

화평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뭐라고요? 윤은 어느 틈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말했다. 그 손목에 이름, 그거. 내 이름이라고요. 최윤. 나라고요 나. 화평은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당신이 누군데."

윤화평의 그 말은 최윤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당신이 누군데. 난 당신 같은 사람 몰라. 본 적도 없어. 근데 이름의 주인이 당신이고 당신과 내가, 이름과 이름으로 연결되었다?

"그, 작가라서 상상력이 풍부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화평은 다시 한번 윤을 뿌리쳤다. 화평의 내뱉은 말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꽂힌 윤은 그 손목을 붙잡고 있을 힘이 없었다. 화평은 바닥에 무너져 울음을 내뱉는 윤을 가만히 내려보다 걸음을 옮겼다. 다신, 보지 맙시다.


윤은 화평을 붙잡지도 못했다. 그 이름을 다시 부르지도 못했다. 그저 바닥에 무너져 눈물을 울면서 가슴을 퍽퍽 치는 일 말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새삼 저지른 죄의 무게가 참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절실히 느꼈다. 아직도 자신은 벌을 받는 것을. 윤은 그렇게 한참을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최윤의 오른쪽 손목에 윤화평의 이름이 새겨졌고
최윤의 왼쪽 팔뚝에 새겨진 숫자 하나가 줄었다.

 

이제 남은 숫자는 28. 시간은 착실히 달려가고 있었다.

 

*****

 

윤과의 만남 이후, 화평은 외부와 연락도 하지 않고 일주일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윤이 자꾸만 떠올라서 화평은 짜증이 났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나을까 싶어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그 꿈속의 배경이 생생히 생각이 나서. 그러면 자동으로 자신이 겪은 일이라고 말하던 윤이 생각이 났다. 그게 겪은 일이라면 그럼 나는. 그 꿈은 분명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끌고 가던 것이었는데 그럼. 그건 뭐냔 말이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한참을 생각하고 있던 화평의 귀에 짧은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문자메시지였다.

[작가님이 다시 한번 뵈었으면 좋겠다고, 연락 기다린다고 하셨어요. 연락주세요.]

화평은 핸드폰 화면을 꺼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윤과 함께 일하는 편집장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만나서 뭐 하려고. 무슨 말을 하게.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또 하려고? 화평은 자꾸 머릿속에 차오르는 윤의 생각을 지워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 울리는 핸드폰. 이번엔 전화였다. 받지 않으려고 버티는 화평과 싸움이라도 벌이듯 핸드폰은 끈질기게 울렸다. 화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아, 안 만난다고요."
-...최윤이예요.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편집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평은 가슴이 갑갑해져 와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날카롭게 나간 말에 윤이 잠시 숨을 흡, 하고 참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나요.
"내가 왜요?"
-만나서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난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습니다. 끊어요."
-아주 잠깐만, 제발 한 번만 만나요.

나한테는 시간이 없어요. 애절한 목소리로 흘러오는 그 목소리를 윤화평은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

 

윤은 자꾸만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찬물을 마셔도 입안이 버썩버썩 말라오는 기분이었다. 두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거나 테이블 위에 올려놓다가, 또는 다리 위에 올려놓다가를 반복했다. 긴장되고 서럽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반갑고 그리운 마음이었다. 그 휘몰아치는 감정을 꾹 눌러 참으며 윤은 화평을 기다렸다. 


이윽고 윤이 기다리고 있던 화평이 문을 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왜 이곳에서 만나자 했는지 화평은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을 애써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 굳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윤과의 모든 것을 끊기 위함이었으니까. 그 목적만 달성된다면 화평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뭐예요? 바쁘니까 빨리빨리 이야기하고 마무리합시다, 예?"
"일단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하세요."

화평은 윤을 쳐다보지 않았다. 윤은 화평이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한시도 떼지 않던 시선을 여전히 그대로 두며 물었다. 자주 꾼다는 꿈 이야기. 그거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아유 참나, 뭐 별거 물어보신다 예? 그렇게 말을 한 화평은 한숨을 푹 내쉬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딱히 별건 없고. 그냥 꽃과 나무가 가득한 넓은 화원에 나인지 아니면 누군지 모를 누가 서 있어요. 양손엔 피가 묻어있고, 한 손엔 피가 범벅이 된 칼이 들려 있고요. 맨 처음에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인진 나도 모릅니다. 안 들렸으니까. 근데 뭐라 말을 하고 나서 비어있는 손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아요. 차가웠던 거 같은데 아무튼, 그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걸어가요. 뒤따르는 사람도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거 같은데 들리지도 않아요. 


화평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손을 잡았다던 사람.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기억이 안 나는 거죠? 예, 안나요 기억. 화평은 대충 대답했다. 윤은 슬쩍 화평의 손등을 두드렸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내가 손 한 번만 잡아도 돼요? 화평은 윤의 눈을 가만히 들여보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맘대로 하세요. 화평의 허락에 윤은 조심스레 화평의 손을 잡았다. 익숙하다. 그 느낌을 받은 건 비단 윤뿐만이 아니었다. 화평도 똑같았다. 낯선 감촉은 분명 익숙했다. 어때요?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내 생각인데. 만약에 내 생각이 맞는다 면요. 그쪽이 꾸었다는 꿈은 어쩌면 전생의 기억일 수도 있어요."

전생. 그 생소한 단어가 화평의 귀를 뚫었다. 전생이 있었다면 넌 뭐였을 것 같아? 따위의 장난스러운 말을 한적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생에서 느닷없이 그렇게. 윤은 어느 순간부터 화평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 당신이 겪은 우리의 전생. 그것일 수도 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화평의 입이 열렸다. 우리?

"우리의 전생이다? 그럼 내가 그쪽이랑 전생에 뭐 엮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네."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은 어디를 갔는지 윤은 당당한 태도였다. 화평은 갑자기 피로함을 느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허-, 하는 짧은 냉소를 지었다. 그래 그 우리의 전생 속에서 당신과 나는 뭐였는데.

"예? 뭐였습니까? 그쪽과 나 사이는."
"왕이었어요. 화평씨는. 나는 당신이 가장 아끼던 책사였고요."
"그게 다?"
"우리는 연인이었어요."

또박또박 닿아오는 목소리는 더 큰 진동으로 화평의 귀를 괴롭혔다.

"당신은 나 때문에 죽었어요."


내가, 죽였어. 당신을.

 

******

 

비가 요란스럽게 창문을 두드리며 내렸다. 조도가 낮아진 방에서 이제 막 내린 커피를 들고 윤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은은하게 음영진 윤의 얼굴은 어딘가 꼭 울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노트북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윤은 천천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무엇에 대해 쓰는지 정해지진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윤은 자판을 두드렸다. 그렇게 전자 활자가 화면을 채워갈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에요. 윤화평."

윤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문을 열어주었다. 화평의 방문을 예상했는지, 예상하지 못했는지 윤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냥 조용히 화평을 받아줄 뿐이었다. 경계심이 서린 얼굴로 윤과 눈을 마주하며 마치 슬로우모션을 건 것처럼 화평은 천천히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화평의 눈빛은 경계심, 그리고 또 무엇이 어려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윤은 잘 모르겠더라.

"무슨 일이냐고 질문은 안 하네?"
"편집장님한테 들었어요."

대답 사이에 공백이 있었음을 화평은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집 좋네. 화평은 대신 그렇게 말하며 윤의 집을 쓱 둘러보았다. 윤은 그런 화평을 지켜보다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번엔, 커피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뭐 마실래요? 화평은 대답했다.

"국화차."

우뚝, 하고 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화평은 태평하게 거실을 한 번 더 휘 둘러보고는 검은색 가죽 소파에 앉았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여전히 굳어있는 윤을 향해 화평은 싱긋 웃었다.

"내가, 입맛이 좀 애 늙은이라."

그제야 윤은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한 것인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직된 것이 보여 화평은 코웃음을 한번 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넓은 거실을 지나쳐 아까까지 윤이 앉아있던 노트북 자리에 닿았다. 화면 가득한 활자를 화평은 표정 없는 얼굴로 읽었다. 미안해요, 우리 집에 국화차가 없어서. 대신 녹차라도 마실래요? 화평은 윤에게서 녹차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렸다. 그쪽이 쓴 거예요. 이거?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이것도 전생의 일인가?"
"그냥, 생각난 거 쓴 거예요."
"아아-."

노트북을 빤히 바라보던 화평이 걸음을 옮겨 다시 소파에 앉았다. 분명 윤의 집인데 화평이 제집인 양 편하고 윤은 불편한 듯 보였다.

"거, 왜 자꾸 긴장해요."
"왜 온 거예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러고 화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숨에 윤의 앞에까지 접근한 화평은 윤의 양쪽 옷 소매를 끌어 올렸다. 오른쪽 손목과 왼쪽 팔뚝, 아까 차를 준비한다며 주방으로 향하던 윤의 뒷목에서 확인한 숫자. 윤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그것을 눈으로 확인한 화평은 한참이나 윤의 오른쪽 손목의 자신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진짜.

"그쪽이랑 내가 인연이다. 뭐 그런 거네. 뭐 빼도 박도 못하잖아. 이거."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나한테 전생을 고백하던 날, 그날 밤. 나한테 이게 생겼어."

화평이 오른쪽 옷 소매를 끌어 올렸다. 윤의 왼쪽 팔뚝과 같은 위치에 선명히 새겨진 숫자 2. 그제야 윤도 제 왼쪽 팔뚝을 바라보았다. 숫자가 27로 줄어 있었다. 각성. 화평은 각성한 것이었다. 그것을 인지하자 윤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아니, 전율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만나 전생을 고백한 뒤 열흘. 다시 만난 화평은 윤의 완벽한 운명으로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름이 새겨진 건 그렇다 쳐. 근데 이 숫자들은 도무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좀 알아봤어. 이 숫자들이 뭔지. 근데 이게 내 시간을 공유한 사람을 뜻하는 거더라고? 팔뚝에 새겨진 숫자는 당신과 만나기까지 내게 남은 시간, 당신과 똑같이 뒷목에 새겨진 숫자는 당신과 내가 전생에 인연으로 만났던 횟수. 그러니까 이말을 다 조합하면 한마디로 운명적인 존재란 거잖아. 그래서 당신한테 온 거야. 확인하려고. 근데, 맞네."

어쩜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냐. 웃기지 않냐? 어? 화평은 허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윤은 웃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이거, 그 본딩인지 뭔지 안 하면 그쪽도 나도 다 죽는다며?"
"네."

화평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평도 윤도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윤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할 때쯤 화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본딩이라는 거, 할까?

 

*****

 

서서히 드는 정신에 윤은 몸을 일으켰다. 욱신거리는 허리는 생각보단 괜찮았다. 침대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윤은 그것을 애써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 들어가 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어제의 붉은 흔적들이 윤의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집요하고, 짓궂었다. 거칠었고, 능숙했다. 어제의 정사를 생각하며 윤은 화평을 떠올렸다 다시 머릿속에서 지웠다. 사실 정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그건 그저 본딩을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표현해도 할 말이 없었다. 몸을 구석구석 씻고 가볍게 옷을 챙겨 입은 뒤 욕실 밖으로 나온 윤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래, 달라진 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지내면 되는 것. 그것이 못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기억의 길이가, 그리하여 품고 있는 마음의 무게가 다르기에 윤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달라진 건 없었다. 윤의 팔뚝의 숫자가 50으로 맞춰진 것 외엔.

 

*****

모든 기억을 지우지 않은 채, 영겁의 세월을 반복하여 살아간다는 것. 다른 얼굴, 다른 이름이지만 그런데도 꾸준히 기억을 모두 축적하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단순히 그렇게 살아가면 축복,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야 한다면 저주라고 윤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윤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저주, 라고 부를 만한 벌이었다.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가장 깊었던 신뢰를 배신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거두었다. 사랑을 배신 한 죄. 윤의 죄는 그것이었다. 남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폭군이었어도, 미치광이 황제였어도 윤에겐 하나뿐인 사랑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천애 고아로 나고 자란 윤의 손을 유일하게 먼저 잡아준 이였고, 다른 사람들에겐 미치광이로 보였으나, 그래도 윤에게만은 순수하고 해맑은 사람이었다. 세상은 미치광이 황제와 함께 윤에게도 손가락질하였다. 그 사랑이 좋다고 받는 너도 미친놈이야. 윤은 상관없었다.


그렇게 끝까지 지켰어야 했던 사랑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모두가 손가락질할 때 좋다고 옆에 있었다면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어야 했다. 하지만 윤은, 그러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난폭해지는 광 황제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일어난 사람들을 윤은 외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윤은 그들의 수장이 되어 자신의 연인에게 칼을 겨누었다. 이것은 비극인가. 미쳐버린 광 황제는 사랑에도 미쳐버려 제게 칼을 들고 도전하는 이들을 제 손으로 직접 죽였으면서도 제게 칼을 겨눈 그 연인만은 죽이지 못했다. 칼을 겨눈 연인이 그다지도 소중해서 그러지 못한 광 황제는, 결국 사랑에 미쳐버린 자답 게 연인의 손에서, 윤의 손에서 죽어버렸다.


그래, 죽을 때 광 황제는 그리 저주를 했던 것 같다. 너를 저주할 거야. 너를 원망할 거야. 너는 평생, 나를 떠올리며 괴로워할 거야. 넌, 언젠간 나를 만나 다시 사랑하겠지만 나는 너를 외면할 거라고. 사랑을 믿지 않고 너를 멀리하는 나를 너는 사랑할 것이라고. 그리고 죽었다. 광 황제는 그리 죽어버렸다. 그때 광 황제는 울고 있었는가, 윤은 확신하지 못했다. 광 황제를 바라보며 희미해지던 눈앞은 꼭 그리 보이긴 했었다. 


사랑했던 이의 신뢰를 깨버린 죄, 사랑했던 이의 목숨을 직접 앗은 죄, 그리고 그 죄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거둔 죄. 그것이 지금의 윤을 있게 했다. 영겁의 세월을 거쳐 가며 그때의 기억으로 시작한 기억이 사라지지도 않은 채 계속 쌓이게 될 거라고. 너는 그 기억을 헤매며 영원히 사랑을 찾을 거라고. 그것이 너의 벌이라고. 다시 태어날 때 들렸던 목소리는 아마도 다른 존재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윤은 끊임없는 윤회의 속박에 갇혀 벗어나지도 못한 채 길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윤은 이 정도의 벌까지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윤이 절대적으로 견디지 못했던 벌은 다른 것이었다. 바로 광 황제.


사람을 죽이긴 했으나, 그것이 대의를 위한 것이었던 윤과 달리 광 황제의 살생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윤의 죄보다 더 무거울 수밖에. 원래대로라면 환생도 윤회도 없는 무간지옥에서 자신이 쌓아온 업보를 갚아가야 하는 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들은 다른 벌을 주기로 하였다. 그래 사실 아주 일말의 연민. 모두를 죽인 네가, 딱 하나를 죽이지 못하여. 그래서 그 딱 하나를 그리도 사무쳐하기에 딱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영겁의 세월로 환생을 거듭하여 살아가는 윤과는 다르게 그는 딱 한 번의 생만을 허락받았다. 대신 모든 것을 잃었다. 제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목숨과 몸뚱아리 하나 그뿐. 그의 모든 것이 퍽퍽하고 메마른 것은 모든 것을 죽인 죄였다.  그리고 기억과 사랑을 앗아간 것 역시 죄로 인한 벌이었다. 그리하여 광 황제는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사랑도 기억도 모두 잃고 한 번의 생만을 허락받은 채 윤회의 길에 올랐다. 그리고 윤의 벌은 여기서 이어진다. 아니 이것은 두 사람의 벌이었다. 영겁의 세월을 걸어가는 윤은 딱 한 번이지만 언제 환생할지 모르는 그를 끊임없이 기다려야만 했고 찾아 헤매야 했다. 그러나 그가 기억을 지운지도 모르고 사랑을 지운지도 몰랐다. 신은 그저 그가 딱 한 번 환생한다고 말해줬을 뿐이었다. 윤은 그렇게 환생을 거듭하며 그를, 광 황제를 기다려왔다. 그래도 신의 특별한 배려로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게 광 황제의 얼굴과 목소리, 이름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최윤은, 그렇게 윤화평을 다시 만났다. 

 

*****

 

화평이 부쩍 윤을 자주 찾았다. 본딩하고 난 후에는 한동안 오지 않다 숫자의 표시가 아슬아슬해져서야 돌아왔다. 그리고 몸을 나누고 화평은 다시 사라졌다. 그것을 한 달, 두 달? 잘 모르겠다. 어쨌든 꽤 오랫동안 그랬던 거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화평은 윤을 찾는 간격이 점점 짧아지더니 이제는 길어야 삼일, 짧으면 하루. 그렇게 윤을 찾아왔다. 윤은 기분은 좋았지만, 어리둥절했다. 왜 이러는 걸까. 그러나 그것을 물어볼 용기는 없어서 윤은 그저 화평이 하는 대로 따랐다. 그때처럼. 


그 불안하기도 어리둥절한 일상을 보낸 지도 거의 2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 사이 화평은 윤의 집으로 들어왔고 윤은 역시나 이유를 묻지 않은 채, 화평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화평이 윤을 자주 찾게 되면서 윤은 국화차를 집에 들여놓았다. 그러나 화평은 그날 윤에게 국화차를 찾은 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국화차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화평은 주로 녹차와 커피를 마셨다. 이번에도 녹차를 우려내 건네주고 본인은 커피를 마시며 화평의 옆 소파에 앉은 윤은 불현듯 화평에게 물었다. 처음엔 감히 넘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거리감도 시간이 약인지 점점 허물어져 가 이제 어느 정도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근데, 왜 그것만 마셔요? 화평은 녹차를 호록 한 모금 넘기고 음, 하며 운을 뗐다. 가볍게 던지는 말이라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윤은 이어진 화평의 대답에 모든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녹차를 좋아했잖아."

나는 국화차를, 너는 녹차를. 그렇게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를 했었잖아, 우리. 지금은 딱히 좋아하는 게 아닌가 봐 응? 부드럽게, 그러나 조금은 짓궂게 묻는 화평을 바라보며 윤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화평은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너는 아직도, 내가 그리 애틋해?"
"윤화평 씨."
"내가. 그렇게 애틋하여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하는 거야? 그때처럼?"
"기억, 기억해요?"

화평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대체 왜 말을 안 했어요? 정신없이 쏟아지는 윤의 질문에 화평은 웃었다. 아 거참, 숨넘어가겠어. 어? 최윤 씨. 그제야 윤은 입을 앙다물고 화평을 쳐다보았다. 화평은 다시 녹차로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너를 자주 찾게 되었을 때쯤. 그때. 기억이 났어. 꿈으로 하나씩. 화가 났는데 생각해보니 결국 인과응보지."
"말은, 왜 안 하신 거예요?"
"타이밍을 놓쳤어. 그뿐이야."

참 깔끔하고 담백한 말이었다. 최윤. 나는, 여전히 네가 애틋하다. 윤은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화평은 그런 윤의 볼을 손등으로 쓱쓱 문질렀다. 울어, 울어. 그냥 울어. 괜찮으니까 울어. 그 말에 윤의 눈물이 터졌다. 그 눈물의 의미를 화평은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손등으로 젖어가는 윤의 볼을 부지런히 닦아주기만 했다. 


기억이 돌아온 연인,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연인.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 그들의 벌, 그리고 삶. 윤은 물었다. 저는 죽어도 환생하지만 그럼 화평 씨는요? 화평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뭐,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나 역시 너를 만날 수 있게 환생할 수 있지 않겠어? 대책 없이 낙천적인 말이었지만, 결국 그게 정답이었다. 윤화평도 최윤도 그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일개의 인간일 뿐. 그 운명을 정하고 결정하는 건 더 위에 있는 존재들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들은 그렇게 지내기로 했다.


더 말하지도, 더 바라지도 않고 그냥 딱 이 정도로만 지내기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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