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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뜨고, 우리는 눈을 감고

 

​시기 (@D2ear_)

0. 애미 죽인 개새끼.

 

화평이 갓 태어났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말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 할아버지가 없었더라면 진즉에 애비한테 던져져 엄마라는 여자와 같이 저승길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화평은 제 목숨 바쳐 본인을 낳아 준 여자에게 고맙다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화평이 태어나면서 얻은 것이라곤, 엄청난 도박 빚과 돈이 없다고 한쪽 눈을 기어이 팔아버린 애비 때문에 생긴 외눈박이 병신 소리였으니까. 게다가 태생적으로 색맹이었는지 화평에겐 세상이 흑백으로 보였다. 딱히 색이 보이지 않더라도 불편함은 없었다. 눈치껏 사과는 빨간색이고, 하늘은 파란색이고, 구름은 하얀색이라고 외우면 되는 거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화평은 눈치는 빨라서 어떻게든 살아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에도,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는 걸 눈치껏 알아챌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

 

 

1. 전화

 

다음 달엔 꼭 드릴 테니까 이번만 봐줘요. 예? 저 아시잖아요. 에이, 그래도 얼굴 맞댄 세월이란 게 있는데 정 없게 이러지 맙시다. 아 진짜 다음 달엔 꼭 드린다니까? 딱 한 달만 기다려 봐요. 내가 밀린 거랑 이자까지 붙여서 소고기로 회식하게 해드릴게. 우리 가게 사장님이 다음 달에 보너스 준다고 했어요. 걱정 마요. 예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은 다 낸다니까요. 예. 끊을게요. 들어가세요. 아, 이미 끊었네.

 

 

2. 살 수만 있다면

 

화평은 편의점에서 살고 싶었다. 생활용품 다 있지, 삼시 세끼 챙길 수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에어컨이 빵빵하니까. 적어도 전기세 걱정한다고 시원하지도 않은 고물딱지 선풍기를 틀까 말까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좋아. 화평은 몰래 빼돌린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회색의 딸기 맛 아이스크림이었다.

 

 

3. 버터 장조림 맛

 

야간 알바가 못 나온다고 대타를 부탁했다. 화평은 흔쾌히 하겠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고맙다고 말할 정도였다. 오늘 밤은 시원하겠네. 휘파람을 불며 폐기된 삼각 김밥을 하나 뜯었다. 운 좋게도 1+1인 삼각 김밥이었다. 하나는 버터 장조림 맛, 다른 하나는 전주 비빔 맛. 화평은 전주 비빔을 먼저 뜯었다. 장조림 맛은 아껴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주 비빔을 금방 해치우고 버터 장조림을 뜯었을 때 익숙한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평은 손에 들고 있던 삼각 김밥을 내려놓았다. 어서 오세요.

 

 

4. 빨간색

 

말보로 레드 주세요.

4500원입니다.

여기요.

잔돈 500원이요. 라이터 필요해요?

됐습니다.

 

화평은 남자의 입술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5. 담배

 

화평은 야간 알바로 타임을 바꿨다. 낮엔 인형 탈 알바를 했다. 더위로 죽기 직전에 인형 탈 알바가 끝이 나면 그대로 편의점으로 들어가 열을 식히며 카운터를 지키는 날이 이어졌다. 열을 식히다 이따금씩 입술이 빨갛던 남자가 생각나면 에어컨을 뒤로하고 밖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다 들어갔다. 화평은 피우던 담배를 말보로 레드로 바꿨다.

 

 

6. 색깔

 

남자는 잊을 만하면 해 뜨기 직전 새벽에 편의점에 왔다. 남자가 사는 물건은 정해져있었다. 담배, 아니면 술. 가끔 콘돔. 그가 올 때마다 화평은 딸기 맛 아이스크림이 분홍색인 것을 알 수 있었고, 편의점 유니폼이 파란색인 걸 알 수 있었다. 콘돔 포장지가 향 별로 색깔이 다른 것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주로 사 가던 콘돔은 검은색이었다. 아무런 향도 없고 가장 기본적인, 제일 단순한 콘돔.

 

 

7. 데일밴드

 

일주일 만에 남자가 편의점에 왔다. 평소에 그가 오던 시간보다 조금은 이른, 12시가 지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남자의 얼굴엔 못 보던 상처가 나있었고, 그날은 담배도, 콘돔도 아닌 작은 밴드를 하나 샀다.

 

 

8. 연고는 서비스.

 

연고는 필요 없어요?

네.

그거 별로 안 좋은데. 차라리 옆에 저걸 사지.

괜찮습니다.

에헤이, 알바가 괜히 추천하는 거 아니야.

그냥 이거 주세요.

거 참 고집 센 사람이네. 내가 직접 갔다 줘?

괜찮다니까요.

이거 접착력 없어. 그냥 붙이자마자 떨어진다니까.

이게 더 싸잖아요.

…할 말 없게 만드네.

…….

이름이?

알아서 뭐하시게요.

난 윤화평. 여기 이름표 보이지?

계산 끝났으면 이만 가겠습니다.

이름 알려주고 가야지. 사람이 왜 이렇게 매정해?

…최 윤이요.

결국 알려줄 거면서.

가겠습니다.

다음엔 그거 말고 저거 사가. 내가 특별히 할인해줄게. 그리고 이건 서비스.

 

화평이 내민 손엔 연고가 있었다.

 

 

9. 손님이 없다

 

이번 달 월급에 보너스를 더 넣어준다는 말을 남기며 점장은 휴가를 갔다. 이맘때쯤이면 편의점에 안 그래도 적었던 손님이 더 적어진다. 화평이 일하는 편의점은 꽤 구석진 곳이라 술에 잔뜩 취해 담배 사 가는 아저씨들이나 근처 원룸에 사는 자취생들이 가끔씩 들리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손님이 안 올 것 같았다. 평화롭네. 화평은 카운터에 앉아 마른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최 윤은 안 오나, 날 밝을 때 좀 와주지. 번호라도 달라 할 걸 그랬나. 얼굴에 그 상처는 뭐였을까. 연고는 바르고 밴드 붙였나….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밖이 죽을 듯 더워서 그런지, 먹고 있는 오징어가 질겨서 그런지, 자꾸만 잡생각이 밀려왔다. 에이, 이거 왜 이렇게 질기냐. 괜히 짜증을 내며 먹던 오징어를 버렸다. 시계는 이제 막 4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화평은 차라리 손님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밀려오는 잡념에 금방이라도 잠겨버릴 것 같았다.

 

 

10. 장마

 

작년에 비해 장마가 일찍 찾아왔다. 처음엔 툭툭, 몇 방울씩 떨어지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어두워 보이는 세상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어 싫었다. 화평은 비가 그치면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카운터에 엎어졌다. 습기로 가득 찬 집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벌써 벽에 곰팡이 폈겠네. 언제 또 그걸 다 제거하냐.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딸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화평은 고개를 들어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새빨간 입술이 보였다.

 

 

11. 비도 오는데, 비도 오니까,

 

말보로 레드 하나 주세요.

아이고, 비에 젖은 생쥐 꼴이네 아주. 여기 일단 물기부터 닦아.

…감사합니다.

연고는 발랐어?

예?

얼굴에 상처. 내가 서비스로 연고 줬잖아.

…….

딱 보니 안 바르고 밴드만 붙였네. 그러면 상처 빨리 안 낫는데.

가겠습니다.

우산은?

필요 없어요.

나 좀 있으면 알바 끝나는데, 같이 술이나 한 잔?

됐습니다.

내가 잘 아는 파전 집이 있는데 거기 가자. 20년 정통 손맛이 아주 기가 막혀.

배 안 고파요.

알겠어. 돈 내가 다 낼게. 지금 그 꼴로 또 비 맞으면 감기 걸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잖아.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러지 말고, 같이 술 한 잔만 하자.

비도 오는데, 딱 한 잔만 나랑 마시자.

 

마침 딱 비가 오니까, 핑계 대기 좋잖아.

 

 

12. 비 오는 날엔 파전

 

화평이 데려간 곳은 골목 구석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찾았나 싶을 정도로 어둑한 골목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철거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곳이었다. 할머니 늘 먹던 걸로 부탁해! 화평은 익숙하게 주문한 뒤 소주 2병을 가져왔다. 윤은 곧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잔반들을 무심히 쳐다봤다. 문득 이런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얼마 만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 사이 화평은 윤의 앞에 휴지를 깔아서 수저를 두고 소주를 잔에 따랐다.

 

자, 잔 들고. 짠 하자.

저 술 못해요.

아 뭐야. 진작 말하지.

그래서 안 온다고 했잖아요.

술 못 마신다고는 안 했잖아.

그쪽이 억지로 끌고 왔잖아요.

아니 그럼 곧 죽을 것 같이 파리한 얼굴로 가려는 사람을 그냥 둬?

됐어요. 마시기나 해요.

에이, 혼자서 무슨 맛으로 술을 먹나.

그럼 마시지 마세요.

언제 안 마신대? 사람이 왜 이렇게 딱딱해.

 

화평은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윤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곤 파전을 크게 찢어 한 입에 넣었다. 윤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괜히 잔반으로 나온 나물을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테이블 위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바닥에 부딪쳐 부서지는 빗소리와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그나마 침묵을 깨주고 있었다. 윤은 화평의 등 뒤로 보이는 창문 너머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응시했다. 화평은 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밖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흘러내린 니트 너머로 불그스름한 흔적이 보였다. 화평은 어느새 비어버린 자신의 잔에 다시 소주를 채웠다. 그리고는 윤의 흔적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대로 한 번에 마셨다. 이렇게 빨리 마시면 안 되는데. 속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최 윤.

예?

뭘 그렇게 놀란 토끼 눈을 뜨고 그래. 이름 한 번 부른 거 가지고.

…왜 불렀는데요.

밖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먹지도 않고 밖만 쳐다보나 싶어서.

그냥, 집에 어떻게 가나 싶어서요.

이따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너는 꼭 한 번 그렇게 튕기더라. 오늘도 그렇고, 전에도 그렇고.

우리가 그렇게 많이 본 사이도 아니잖아요.

딱 봐도 사람이 그렇게 보여.

참 나. 그쪽도 딱 봐도 오지랖 넓어 보여요.

잘 아네.

 

화평은 어이없어하는 윤의 모습을 쳐다보다 깍두기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잔뜩 시었는지 시큼한 맛이 났다. 어우, 깍두기 너무 시다.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소주를 한 잔 넘겼다. 어디선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13. 담배

 

가게를 나왔을 땐 비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나 한 대만 빌려줘. 화평이 자연스럽게 윤에게 말했다. 윤은 바람 빠진 웃음을 뱉더니 해탈했다는 듯, 담배를 꺼내 건넸다. 불은 있어요? 윤이 물어보자 화평은 웃으며 윤을 쳐다봤다. 불은 있어. 화평은 담배를 물고 윤의 목덜미를 잡아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끌어내렸다. 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평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서로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비가 다시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화평에게서 알싸한 향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윤은 화평의 어깨를 밀쳐내며 떨어졌다. 동시에 윤의 입에 물린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담배는 어느새 많이 짧아져 있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내가 뭘.

불 있다면서요.

그래서 내 거 썼잖아.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저 먼저 갈게요.

놀랐어? 얼굴 빨개졌네.

안 빨개졌거든요.

빨간데.

안 빨갛다고요!

우산 쓰고 가. 딴 사람이 보면 너 술 먹은 줄 알겠다.

필요 없어요.

난 우산 하나 더 있어. 갖고 가. 나랑 밥 먹어준 보답이라고 생각해.

 

화평이 어서 받으라는 듯 우산을 건네자 윤은 머뭇거리다 마지못한다는 표정으로 우산을 받았다. 윤이 우산을 펴고 가게 아래에서 벗어나 화평과 마주 섰다. 우산 위로 비가 타닥거리며 튀어 오르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은 괜히 발끝만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화평은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은 채 무심한 얼굴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비 사이로 흩어졌다.

 

당신은 안 가요?

난 이거 다 피고 가려고. 왜 기다려주게?

됐어요. 먼저 가겠습니다.

조심히 가.

…윤화평 씨도 조심히 가세요.

 

화평의 담배도 어느새 짧아져 있었다.

 

 

14. 그런 만남

 

이번 장마는 짧을 거라는 앵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듯 장마는 길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역대 제일 긴 장마라며 떠들곤 했다. 화평과 윤은 길고 긴 장마 기간을 빌미로 만남을 이어갔다. 대게 화평이 혼자 있기 쓸쓸하다며 윤을 불러냈고, 윤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화평을 만나러 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우산을 챙겨오는 건 화평이었고, 우산을 드는 건 윤이었다. 매번 화평은 윤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윤은 화평에게 고맙다며 작은 사탕 따위를 주곤 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그런 만남은 지속되었다.

 

 

15. 너는

 

긴 장마가 끝이 났다. 이제 무슨 구실로 불러내야 하나. 화평은 하루 종일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윤을 불러낼 생각을 했다. 비가 올 땐 연락이 잘 됐는데 비가 그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연락이 뚝 끊겼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오던 편의점도 오질 않았다. 안 왔으면 싶은 사채업자들의 문자는 쉬지 않고 오는데, 한 글자라도 좋으니 제발 왔으면 하는 윤의 소식은 오지 않았다. 장마가 끝나자 너도 같이 없어져 버렸다. 운명의 상대일 줄 알았는데, 너는 결국 장마였나.

 

 

16. 소나기와 전화

 

소나기가 내렸다. 혹시나 윤이 오지 않을까 싶어 화평은 아예 그날 하루 종일 알바를 하기로 했다. 적당히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은근히 기분을 띄워줬다. 또 오늘은 꼭 윤이 올 것 같았다. 소나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윤은 오늘 화평을 찾아올 거라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화평은 카운터에 서서 빗소리를 음악 삼아 그 사이로 걸어올 윤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쉬지 않고 전화 오는 사채업자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17. 7:29 p.m.

 

전화를, 왜, 안, 받아. 병신 새끼야.

…….

한 달 지났어.

…….

우리가 많이 봐준 거 알지?

…….

니 애비 할애비 다 팔아도 돈 안 나와. 애초에 다 늙어빠져서 팔리지도 않던 걸 억지로 팔아넘겼고.

…….

그래서 돈은?

…딱 한 달만 더 기다려 준다면,

눈이 병신이라 머리도 병신인건가?

…….

야, 얘 끌고 가.

 

 

18. 9:01 p.m.

 

어서 오세요.

헉, 괜찮으세요? 그, 그쪽 얼굴이….

괜찮아요. 2100원입니다.

여, 여기요.

안녕히 가세요.

 

 

19. 10:50 p.m.

 

야, 알바생 얼굴 봤어? 완전 장난 아니던데.

나 아까 학원 가는 길에 봤어. 어떤 남자들한테 끌려가던데?

헐. 영상 찍은 거 있어?

진짜 잠깐 찍었어. 그 시꺼먼 남자들이 너무 무서워서….

대박 같이 보자.

아 그리고 얼핏 들었는데, 저 알바생 한 쪽 눈 안 보인데.

아 그래서 지금 한 쪽 눈 감고 있는 건가? 난 그냥 맞아서 그런 줄.

그런가 봐. 야 이 영상 봐봐. 남자들 개무섭지.

미쳤다. 너 이걸 어떻게 찍었냐. 잘못 걸렸으면 너도 맞았겠다.

그니까. 안 걸려서 다행. 이제 우리 슬슬 집 갈까?

그래. 여기 오래 있기도 좀 그렇다. 알바생 얼굴 저러니까 좀 무섭기도 하고.

 

 

20. 문자

 

‘윤화평 고객님, 장기기증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 더운 여름철 몸 관리 잘 하시고 곧 찾아뵙겠습니다…’

 

 

21. 00:31 a.m.

 

담배 하나 줘.

무슨 담배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줘.

말보로 레드 4500원입니다.

내가 언제 말보로 레드 달라고 했어? 이거 얼굴이 병신이라 말을 못 알아듣나?

찾는 거 있으세요?

술이나 하나 갖고 와.

손님이 직접 가져오셔야 하는데…

내가 가져오라면 가져오는 거지 말이 많아!

…죄송합니다.

병신새끼.

…….

뭘 쳐다봐. 빨리 가져와!

…네.

 

 

22. 01:42 a.m.

 

어서 오세요.

…….

…….

말보로 레드 하나요.

…4500원입니다.

…….

우산 없지? 같이 가자.

 

 

23. 비 오니까요.

 

얼굴이 왜 그래요.

가다가 넘어졌어.

넘어지는데 그렇게 다쳐요?

좀 굴렀어.

지금 왼쪽 눈 안 떠지는데요.

피곤해서 그래.

…….

왜 한동안 안 찾아왔어?

…바빴어요.

전화도 안 받고.

바빴다니까요.

그럼 오늘은 왜 왔어?

 

 

24. 오늘 하루만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저기 최 윤.

네?

나 오늘 하루만 재워주라.

…지금요?

응.

…….

나 얼굴 다친 거 아파. 우리 집에 연고도 없고 밴드도 없어서 그래.

…….

딱 오늘 하루만 부탁할게.

…….

…….

…들어와요. 집 더러워도 참으셔야 해요.

아무렴.

 

25. 윤의 집

 

윤의 집은 낡은 건물 옥탑에 있었다. 빨랫줄에 걸려있던 옷들은 그대로 비에 젖어 축 늘어진 채였다. 윤은 머쓱한 듯 괜히 헛기침을 하고 문을 열었다. 윤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조촐한 방이었다. 작은 탁자 위엔 담배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하나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바닥에 깔려있는 이불은 방금까지 뒹굴었는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고 주변엔 콘돔 포장지가 널려있었다. 방은 아예 냄새가 뱄는지 정액 냄새가 났다. 어휴, 청소 좀 해라. 이게 사람 방이야 돼지우리인지. 화평은 개의치 않는 듯 대충 바닥에 앉아 주변의 쓰레기를 치웠다. 윤은 화평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불을 대충 치우고 화평 옆에 앉았다. 배 안 고파? 집에 먹을만한 건 있어? 화평은 자리에서 그대로 팔을 뻗어 냉장고를 열었다. 끼니를 제때 챙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듯 냉장고 안엔 술과 생수 몇 병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화평은 예상했다는 듯 냉장고를 닫고 주머니에서 폐기된 삼각 김밥을 꺼냈다. 전주비빔과 버터 장조림 맛이었다.

 

아무리 바쁘다지만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해. 한국인은 밥심 몰라?

배 안 고파요.

빨리 먹어.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이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아직 먹을 수 있어.

윤화평 씨는 진짜… 대단하네요.

칭찬은 고맙네.

 

화평은 윤에게 버터 장조림을 건넸다.

26. 연고와 밴드

 

삼각 김밥을 다 먹고 나자 화평은 피곤하다며 윤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윤은 화평에게 뭐 하는 짓이냐며 따지려고 했으나 여기저기 멍들고 상처 난 화평의 얼굴을 보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상처 안 아파요?

아파.

연고랑 밴드 줄게요. 앉아 봐요.

나 피곤한데… 그냥 이대로 있으면 안 돼?

빨리 앉아 봐요. 연고 발라줄게요.

에휴 할 수 없지.

 

화평은 귀찮다는 듯 말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윤은 서랍을 뒤적여 연고와 밴드를 꺼내 화평과 마주 보고 앉았다. 손에 연고를 짜고 조심스럽게 화평의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아 따가. 살살 발라줘. 아파.

좀만 참아요.

그거 내가 준 연고 맞지.

네.

별로 안 썼네.

…쓸 일이 별로 없어서요.

밴드는 별로 없는데?

…….

아 아파!

참아요.

은근 성격 나쁘네.

…….

아!

조용히 좀 해요. 거의 다 끝났어요.

아냐 내가 할게.

아뇨 제가 해드릴게요.

아니 줘. 너한테 맡겼다가 상처 더 커지겠다.

제가 해드린다니까요.

됐거든요. 이리 줘. 빨리.

아니 왜 이래요? 저기요 잠깐…!

 

윤의 손에 들린 밴드를 가져가겠다고 실랑이를 하다 그대로 화평이 윤의 위로 넘어졌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정적 사이로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화평은 고개를 숙였고 윤은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27. 섹스하고 담배 피면서 대화했다

 

화평 씨.

왜.

왜 저랑 섹스해요?

이유가 있어야 해?

그냥 궁금하잖아요.

딱히 없는데.

참 나.

특별한 이유 있으면 좋겠어?

아뇨, 그건 아닌데.

너랑 하면 좋을 것 같아서.

…….

그게 다야. 좋을 것 같아서. 그냥 좋아서 하고 싶었어.

 

네가 좋으니까, 그거면 충분하잖아.

 

 

28. 운명이란 1

 

최 윤.

네.

운명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음… 글쎄요. 있을 것 같긴 한데.

난 있다고 생각해.

왜요?

너를 만나서?

뭐예요 그게. 오글거려.

진짜야. 나 원래 색맹이었는데 너 만나고 색맹 나았다니까.

거짓말.

이걸 어떻게 증명할 수도 없고, 답답하네.

그럼 지금은 색이 다 보여요?

응. 너 얼굴 빨개진 것도 다 보여.

아 진짜. 아니라구요.

완전 빨개 지금. 내가 이때까지 본 모든 것 중에 제일 빨개.

놀리지 마요.

귀엽네.

됐네요.

 

 

29. 운명이란 2

 

근데요.

응.

만약 운명이 존재한다면, 좀 억울한 것 같아요.

왜?

화평 씨나 저나 이런 기구한 삶을 살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평범한 삶도 있었을 텐데.

그래서 아쉬워?

조금은요.

나도 그래.

운명이 가혹하네요.

그러게. 가혹한 운명이네.

 

 

30. 해는 뜨고, 우리는 눈을 감고,

 

윤은 피곤한 지 반쯤 잠에 취한 채로 눈을 깜빡였다. 피곤하면 얼른 자. 나도 곧 마무리하고 잘게. 화평은 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윤화평 씨도 얼른 옆에 누워요. 살짝 잠긴 목소리가 속삭였다. 곧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화평은 낮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고 가스가 제대로 열렸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본인도 윤의 옆에 똑같이 누웠다. 어느새 새벽은 걷히고 있었다.

 

 

31.

 

윤화평 씨.

응.

세상이 흑백일 땐 어땠어요?

어떻긴, 지금이랑 똑같지.

불편한 점 없었어요?

음, 학교 미술 시간 때? 이상하게 색칠했다고 애들이 놀린 거 빼고는 뭐 없네.

별거 없네요.

어차피 인생이 잿빛인데 뭐.

그건 그래요.

그래도 너 만나고 나서 좋았던 건 있어.

뭔데요?

섹스할 때 너 얼굴 빨개지는 걸 볼 수 있었다는 점.

아 진짜.

다행이지. 네가 내 운명의 상대라서.

참 나….

이제 자자. 해 뜬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더 할게요.

뭔데.

왜 계속 반말 썼어요?

너도 반말 쓰던가.

됐어요.

그럼 다음 생엔 네가 먼저 반말해. 나는 존댓말 쓸게.

다음 생에도 운명이면 그럴게요.

그땐 세상이 밝았으면 좋겠다.

잘 자요.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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