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색
폴린 (@_sont9)
잿빛의 허공 위를 탁한 것들이 평화롭게 떠다닌다. 턱을 괴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잠시 돌린 최윤은 밝은 빛에 인상을 찌푸리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허연 공책에 까만 줄을 마저 그리다 갑자기 뚝 끊겨 나오지 않는 볼펜을 여백에 아무렇게나 뻑뻑하게 긁었다. 더 이상 잉크를 뱉지 못하는 볼펜을 책상 귀퉁이로 밀어 버리고 필통에서 새 볼펜을 꺼내들었다. 따라잡지 못한 글씨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는 교수의 안내에 모자를 고쳐 쓴 최윤은 책과 노트를 쓸어 담았다.
여전히 최윤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세상은 검은색과 흰색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횡단보도도, 신호등도 고양이도 무지개도.
색을 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은 그 이전으로 돌아가면 자살할 거라고 했다. 어째서 그렇게 색에 집착하는지 모를 따름이지. 이외의 색상이 전혀 구별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저 흰색과 검은색의 그 중간 어드매에 존재했다.
색을 못 본다고 해서 불평등한 삶을 사는 건 아니다. 그저 조금 궁금할 뿐. 색을 보지 못하는 자를 가려진 자, 보는 자들을 알게 된 자. 이렇게 구별해 부르기도 했다.
처음엔 사랑에 대해 예찬하던 자들은 침을 튀겨가며 빛을 그린 그림을 설명하기도 하고, 바다의 푸른 물빛이나 들판 곳곳에 피어있는 꽃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최윤은 색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발가락을 간질이는 투명한 쥐색과 풍성한 파도 거품, 지평선 너머로까지 뛰어노는 무채색의 빛들이 마음에 들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색을 볼 수 있다더라, 뭘 하면 보인다더라, 성 아그네스 전야제 날 일찍 잠들면 운명의 상대를 볼 수 있다더라.는 등 여러 가지 미신이 돌았지만 성공했다는 케이스를 본 적이 없다.
'우주가 정해준 운명의 상대가 색을 선물해준다.'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색을 볼 수 있게 되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었다. 과학계는 호르몬이 바로 열쇠라고 했고, 종교계는 쓰인 운명이라고 이야기를 했으며 심리학에서는 최면을 통해 단기간이지만 색을 볼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운명의 상대라고 해서 꼭 사귀고, 결혼하고, 남은 인생을 같이 걸어가는 것도 아니더만. 하지만 처음으로 색을 본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 번도 색을 접해 보지 못한 건 아니다. 몇 년 전 성당에서 일렁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햇살이 부드럽게 부유하던 유리창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있는 입가에 머물러 일렁이던 색의 이름을 아직 알지 못한다. 검은색도 흰 색도, 진한 회색도 아닌 그 색은 그저 따듯하고, 부드러워 퍽 다정하기만 했다. 햇살에 이름이 있다면? 색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지어 놓은 이름이 있었겠지만 그전까지 윤은 그 색은 햇살색이라고 부르리라 마음먹었다. 최윤만의 작은 비밀이었다.
4:00
손목에서 시간의 흐름을 읽은 최윤은 서둘러 지하철을 갈아탔다. 아르바이트에 조금 늦게 생겼다. 책장을 빽빽하게 채운 오래된 레코드판과 고소한 책 냄새, 연주자의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떨어지는 조명이 인상적인 지하에 위치한 작은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한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여유로운 주인의 성정 탓인지 오는 단골손님들의 성격도 조용하고, 독특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거나 가져온 책을 읽는 '독서왕'과 한글을 켜놓고 뭔가를 써 내려가는 '김 작가'가 생각났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본인들은 최윤이 지어준 별명을 좋아할지 좋아하지 않을지 몰라도 항상 같은 음료를 시키고,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노래 취향도 다르고 겹치는 시간도 다른 둘과 내적 친밀감을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참. 까르르 웃기 바쁜 50대 계모임도 있었다. 이들만 왔다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비정기적 방문을 하는, 최윤이 퇴근할 때쯤 방문해 술을 마시는 콤비도 있지. 사장님과 최윤은 그 둘은 만담 콤비라고 불렀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꽤 웃겼다. 윤화평! 과 깡. 서로를 그렇게 부른다. 어째서 깡이라고만 부르는지, 최윤처럼 외자인 건지, 아니면 이름 두 글자 중에 하나인지, 아니면 성인지 많이 궁금했지만 궁금한 채로 둬야만 했다.
2.
오늘도 사장님의 선곡은 최윤보다 나이는 배로 먹은 듯한 오래된 LP 판에서 시작한다. 시간이 묻어 누래진 종이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어 마른 천으로 한 바퀴를 둘러 먼지를 제거한 뒤 기계에 판을 조심스레 끼워 맞춘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부터, 바늘이 제일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 음악이 나오기 전까지의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어떤 음악이 나올지 괜히 귀를 기울이게 되고 기대하게 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기록을 다수 세우고 상을 받은 노래나 가수를 알지 못했던 최윤은 이곳에서 일을 한 뒤로 흘러나온 노래에 담긴 역사와 인물의 성품 관련된 스캔들, 그리고 노래에 담긴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됐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팝송은 영 취향이 아니었는데 가끔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설거지를 하다가도 흥얼거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노래 좋아해요? 우리 카페는 노래를 좋아해야 채용하거든."
"즐겨듣는 편이 아닌데. 정말 어려울까요? 좋아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솔직해서 마음에 드네. 좋아요. 같이 일해보도록 합시다. 요즘은 아이돌 노래도 레코드판으로 나와서 몇 개 샀거든. 좋아하는 아이돌 있어요? 영화도 좋고. 물론 LP 판만 트는 건 아니고, CD도 가능해요. 하지만 우리 단골손님들은 레코드를 더 좋아하더라고. 나도 그렇고. 오픈 준비만 조금 도와줘요. 퇴근 준비는 내가 할게. 아직 학생이라고 했죠?"
양 사장님은 지금까지 겪던 어른들과는 조금 많이 독특한 분이셨다. 잔 정이 많다고 해야 할까, 세월의 흔적이 남은 희끗한 머리와 눈가의 주름이 부드럽게 주름지며 웃을 때면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고는 했다.
혼자 살고 있다고 하자 남은 빵이나 과일을 싸주기도 하고, 가끔 반찬을 많이 했다며 작은 찬 가지를 챙겨주시기도 해 한사코 사양하는 게 일이 됐다.
2주, 4주, 격주 토요일 일요일 양일엔 작은 정기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정기적으로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도 있으며 이외에도 무대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이면 자유롭게 연주가 가능했다. 물론 평일은 사장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오늘도.
양 사장님이 또 말해주는 걸 깜박 한 모양이었다. 천둥같이 큰 조명이 커지는 소리와 동시에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이 무대 위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무대 위로 뛰어 남자 한 명이 뛰어 올라와 기타줄을 어깨에 올리고 빛 사이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가장 친한 저의 친구, 네 저의 오랜 술친구죠. 강길영 형사님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무대에 오르게 됐습니다. 아 진짜 부끄럽네. 깡 생일 축하한다. 기타 놓은지 벌써 10년이 지나서 급하게 연습을 좀 했는데 별로여도 봐 줘라."
"야! 윤화평! 떨지 말고 잘해!"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조금만 시간을 내어 제 친구의 생일을 같이 축하해주세요."
매번 술에 잔뜩 취해 꼬이고 풀린 발음을 가진 목소리만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좋네? 윤은 팔짱을 꼈다. 남자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반주를 시작하자 무대를 뺀 주변이 조금 어두워졌다. 정말 그들 답지 않은가. 강길영, 깡. 윤화평! 주먹으로 입술을 가리고 웃었다. 그의 동그란 이마 위로 산란하는 빛이 마치 햇살색 같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에 맞춰 나온 사장님은 그들의 테이블에 초를 붙인 딸기가 알알이 잔뜩 올라간 케이크를 올려주었다. 오늘 생일이라고 다 같이 모인 모양이었다. 최윤은 바에 기대어 노래를 따라 부르진 못해도 박수를 같이 따라 쳤다.
초를 불어 끈 그들은 손뼉을 쳤다. 결국 길영의 얼굴에 케이크를 묻히고 등짝을 맞는 고선배라는 사람을 보며 따라 웃다가, 이어서 들리는 반주 소리에 의아함을 느꼈다. 마이크 끝에 입술을 붙인 채 숨을 머금는 소리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윤의 몸을 관통했다. 일렁거리던 빛이 심장소리에 맞춰 부드럽게 퍼져 나온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숨을 어떻게 쉬었더라? 단조롭기만 하던 세상이 다채롭게 변하는 이 순간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저 놀라운 경험이었다. 예측 불가능하게 최윤의 앞에 나타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것들에 둘러싸인 그를 눈으로 좇는 게 다였다. 범람하는 빛의 세계에서 최윤은 그저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파도에 쓸려 내려가지 않는 방파제가 되어야 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삼켜본다. 햇살 색은, 이제 윤화평이 되었다. 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