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top.png
png.png
png.png
png.png
png.png
png.png
png.png
1color-2.png
png.png
png.png
png.png
png.png

커피 향이 스며든 그 겨울의 고흐

 

​지츄 (@jichu_ukku)

딸랑-


기분 좋은 종소리에 화평은 물을 붓던 주전자를 잠시 내려두고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자주 오는 손님, 윤이었다.


“오셨어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인영에서 시선을 거둔 뒤 다시 핸드 드리퍼에 물을 붓다 보니 자신 앞에 윤이 목도리를 벗으며 앉았다. 다른 카페와는 달리 콘센트를 많이 두지 않아 커피 포트를 연결해야 하는 드립 공간 쪽에 콘센트가 모여 있어 노트북을 사용하는 손님들이 애용하는 자리였다. 그 중에서도 윤은 단골 중의 단골이었다. 휴무일인 화요일과 사람이 붐비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는 손님이었다. 


“실례합니다-”


의례적이긴 하지만 화평이 메뉴판을 건낼 때 항상 하는 말이었다. 이제는 메뉴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주 왔는데도 윤은 메뉴판에 쓰인 글씨를 한 자 한 자 읽으며 고민했다.


“브라질 아이스 한 잔 주세요.”
“항상 같은 거 드시면서 고민하시긴,”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농도는 어떻게 해드릴까, 진하게?”
“네.”
“조금만 기다리십쇼 고객님~”


윤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원두를 준비하는 화평을 바라보았다. 작게 웃던 화평이 전동 그라인더로 갈아 떨어지는 원두의 향을 맡다 시선을 옮기니 책을 읽는 윤이 보였다. <글렌 굴드>. 글렌 굴드라… 저도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인지라 갈린 원두를 잠시 내려두고 음악을 검색해 앨범 전체 재생을 눌렀다. 책에 집중해 모르는 것 같더니 어느 새 고개를 들고 갸웃하는 모습이 꼭 토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주문하신 브라질 아이스 나왔습니다.”
“윤화평씨가 튼 겁니까?”
“뭘요?”


짐짓 모른 척을 하니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참 저 손님 성질 정말 예민하셔.


“노래 말입니다. 이 곡.”
“아유 우리 단골 손님이 글렌 굴드 관련된 책 읽고 계시길래 분위기 좀 맞춰드렸죠. 어때, 마음에 드세요?”


키득거리는 화평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윤이 커피를 호록 마셨다. 항상 비슷한 듯 다른 맛과 향. 항상 차갑게 마시는데도 마실 때마다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커피 향을 느끼다 보니 달큰하고 부드러운 버터 향도 느껴진다. 곧 스콘이 나올 시간이었다. 멍하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 할 일이 생각나 노트북을 꺼내 타자를 치고 있으니 화평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농도는 입에 맞으시고?”
“네. 맛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우리 최윤 손님 맞춰드리기 어려운데 성공했네.”
“뭐라고요?”
“아이고 주름 생겨요. 미안해요 미안해. 얼른 집중하세요.”


꼭 저렇게 사람 놀려야 직성이 풀릴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일에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하얀 와이셔츠에 아이보리빛 에이프런을 입은 화평이 움직일 때마다 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오는 손님이든, 오래 된 손님이든 항상 살갑고 능청맞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 타인에게 벽을 세우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밝은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윤은 능숙하게 원두를 갈고 여과지를 끼우고 주전자로 커피를 내리는 화평의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쳐다 보고 있다 퍼뜩 정신차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자신이 일에 집중할 때는 잘 말을 걸지 않는 화평이었다. 윤은 노트북 화면을 멍하게 바라보며 애꿎은 마우스 휠만 돌리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과 웃고 떠드는 소리가 자꾸만 귀에 거슬렸다. 왜 짜증이 나는지도 모른 채 윤은 이어폰을 찾아 꽂고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려던 챕터까지 번역을 마친 윤이 이어폰을 빼자 불쑥 따뜻한 물이 눈 앞에 들어왔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웃고 있는 화평이 보였다. 


“이쯤 되면 따뜻한 물 찾으셔야 하는데 조용하셔 가지고. 한 잔 마셔요.”
“아”


가방을 정리하려던 손을 내리고 따뜻한 컵을 잡으니 온기가 올라온다. 항상 손이 차서 아이스를 마셔도 따뜻한 물을 부탁하곤 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마음에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리며 홀짝 물을 마셨다. 간질거리는 마음이 영 익숙하지 않아 가방을 챙기자 화평이 따르던 커피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가시게요?”
“네.”
“더 있다 가시지”


가려는 손님들에게 항상 하던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묘한 기분에 윤은 더 빠르게 가방을 챙겼다.


“일이 있어서요.”
“바쁘시네.”

“다음에 또 오세요.”


계산을 하러 바에서 나와 포스기로 온 화평이 씩 웃으며 말했다. 대답을 하려던 윤은 그저 고개만 까딱 숙이고 카드를 챙긴 뒤 가게를 나왔다.
가게가 위치한 골목을 나서다 뒤를 돌아 보니 간판이 보였다. PYeong Coffee Project. 자신의 이름 중 가장 좋아하는 글자인 평을 따서 만든 이름이라고 했다. 모남 없이 평탄하게 가게를 꾸리고 싶다고 했었지. 그런 가게 주인과는 달리 모나기만 한 자신을 떠올리던 윤은 집으로 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윤은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이상하게 지치는 마음에 누워있는데 자꾸만 자신의 손과 닿았던 화평의 손이 떠올랐다. 눈치도 빠르지.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바로 알아차릴 줄이야.


“뭐 필요해요?”
“네? 아, 쓰레기통이 어디 있나 해서요.”
“나 줘요.”
사용한 휴지를 건네주려는데 크고 두툼한 손에 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까지 얹어버렸다.
“아이고 차가워라. 손이 원래 이렇게 차요? 아니 손도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 맨날 아이스만 먹어요?”
“워, 원래 그래요.”
“다음부터는 따뜻한 것 좀 드세요.”


바보같이 말이나 더듬고. 자꾸만 낮의 기억이 떠올라 괜히 소파 쿠션만 쥐어 뜯던 윤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가 핑 도는 머리에 다시 눕고 말았다. 지긋지긋한 빈혈, 그리고 저혈압. 머리가 핑 도니 카페에서 펜을 줍다 휘청한 자신을 잡아주던 화평이 떠올라 다시 한 번 얼굴이 붉어졌다. 


“아 왜 이러지.”


윤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데스크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이라도 해야 잡생각이 덜 들 것 같았다. 

 

여느 때처럼 화평의 가게에서 작업을 하던 윤은 갑작스런 달각 소리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스콘이 담긴 접시가 자신의 자리에 놓여있었다. 뭐지? 하며 고개를 드니 뺀질뺀질한 얼굴이 씨익 웃고 있었다. 


“거 본인 입술 드실 바에 스콘을 드세요.”


뭔 소린가 싶어 얼굴을 찌푸리다 정신을 차려 보니 혀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집중할 때마다 입술을 물어 뜯는 습관 탓이었다. 괜히 마음이 간질거려 고개만 꾸벅였다. 이럴 때마다 쿵쾅거리는 자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화평이 고개를 쑥 내밀고 작업해야 하는 책을 슬쩍 쳐다봤다.


“아니 뭔데 이렇게 고민을 해요? 입술 다 없어지겠네.”


“아. 고흐라는 화가랑 관련된 책이에요. 색채 묘사가 있어서요. 중간에 <Vincent>라는 노래가 인용되어 있는데 색과 관련된 가사가 많거든요. 관련 서적을 읽어도 와 닿지가 않아서 번역이 안 돼요. 그림을 봐도 느껴지는 게 없고. 그냥 사전에 있는 뜻을 옮기면 문제야 없는데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하네요.”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을 많이 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움직이는 입술을 바라보던 화평은 색채로 인한 답답함에 동질감을 느꼈다. 


“하긴. 저도 처음 커피 시작했을 때 색 못 봐서 힘들었어요. 로스팅된 원두 색을 봐야 어느 정도됐는지 아는데 책이랑 인터넷 봐도 모르겠고, 그냥 나와 있는 방식대로 시간 설정하고 냄새 맡고 커핑 도 엄청 많이 했어요. 덕분에 후각이랑 미각은 엄청 좋아졌는데 원두만 몇 포대 버렸는지 몰라요. 지금도 로스팅 방식 바꾸려면 또 원두 엄청 버려야 해요.”


그런 불편함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윤이 스콘을 한 입 물었다. 직접 반죽해서 구워 내는 스콘은 항상 고소하고 달콤했다. 설탕도 많이 안 넣고 함께 서브하는 잼도 많이 달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달콤한지. 스콘을 먹는 윤을 바라보다 자신도 모르게 바람 파진 웃음소리를 내버린 화평을 윤이 빤히 쳐다봤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뭐”
“왜 웃으시냐니까요?”
“아 거 참 집요하시네. 토끼 같아서 봤어요.”
“지금 저보고 토끼 같다고 하신 겁니까?”
“왜요 토끼가 어디가 어때서.”
“말을 말죠.”
“토끼 귀엽기만 한데,”
“사장님”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님. 무섭습니다 무서워.”


밉지 않은 넉살에 괜히 더 날을 세우게 되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토끼를 닮았다는 말에 윤은 자신도 모르게 설렘을 느꼈다. 미쳤구나 최윤. 혼란스러움에 괜히 스콘만 우걱우걱 삼키고 짐을 정리하자 화평이 살짝 놀란 목소리를 말을 걸었다.


“아유 좀 천천히 드시지-”
“괜찮습니다. 계산해주세요.”
“벌써 가시게요?”
“네 일이 있어서..”
“깜깜한데 조심히 가세요.”


다정한 인사에 목례만 하며 윤은 가게를 나섰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의 동요가 익숙하지 않았다. 

 

 

 

 


윤이 화평의 가게에서 스콘을 얻어 먹은 뒤로 꽤나 오랫동안 화평의 가게를 찾지 못했다. 외주 고객과의 미팅이 줄줄이 있었고 마감도 겹친 탓이었다. 급한 원고부터 하나 둘 밤을 새워가며 마감하고 기절하듯 잠에 든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소파에서 잠들어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 두 시라니.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일어난 건 오랜만이네. 까치집을 지은 머리를 매만지며 윤은 화평의 가게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익숙한 종소리를 들으며 가게에 들어서자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익숙하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얼굴. 머리였다. 항상 부스스하던 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 뭘 또 그릏게 봐요. 너무 잘생겼어요?”
“어디 가세요?”
“참나 이렇게 무시하시네. 네 오늘 끝나고 어디 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 커피의 대가 강길영 씨와 설거지의 대가 하림이가 마감할 거에요.”
“까분다. 여기 메뉴판이요.”
“형, 내가 왜 설거지의 대가에요! 내가 커피의 대가지!”


화평이 사정이 있을 때 종종 가게를 봐주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메뉴판을 받아 들며 티격태격하는 셋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브라질 아이스를 시키고 또 같은 메뉴 마신다는 핀잔을 들은 뒤 요 근래 계속 골머리를 썩게 하는 책을 꺼냈다. 인상주의 화가 반 고흐에 관련된 책이라니. 
60년 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모두가 색을 잃은 뒤로 화가의 존재는 무의미해졌다.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는 방문객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보존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여전히 강경해 유지만 되고 있었다. 색채를 찾은 사람들이 종종 찾곤 했지만 그런 이들은 소수이기도 했고 색채를 찾게 된 원인도 불분명해 미술관과 박물관은 언제나 고요한 공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화가에 관련된 책이라니. 이걸 정말 출판할 셈인가. 출판사 직원의 안목에 한숨을 쉬며 몇 일 간 자신을 괴롭힌 주인공이 노래하는 부분을 다시 한 번 펼쳤다. 그냥 노래를 불렀다고만 하지 왜 굳이 가사를 인용해서 자신을 괴롭히는지. 도대체 팔레트를 파랗고 회색 빛 으로 칠하는 건 무엇이며 눈빛의 린넨을 닮은 들판 위의 색 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해도 못한 채 기계적으로 뜻만 옮기는 작업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사전을 찾아 봐도 이해하지 못한 영역을 옮기는 작업이라니. 기계랑 다를 게 뭐가 있어. 가사 인용 옆 한 페이지 크게 그려진 그림은 윤의 절망감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뾰족한 산의 형태를 중심으로 보이는 수많은 동그라미 모양들을 노려보던 윤 앞에 달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문한 커피가 담긴 유리잔이 놓였다.


“뭘 그렇게 노려봐요. 눈 나뻐지겄네.”
“아 저번에 말한 그 일이에요. 그림까지 있어서 더 어렵네요.”
“윤이씨는 잘 할 수 있을 거에요.”


희망적이다 못해 낙관적인 응원에 헛웃음이 나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단어는 옮기자는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데 딸랑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손님이 왔다.


“어 형 왔어?”
“이야 윤화평 오늘 소개팅 한다고 머리에 힘 좀 줬다?”
“뭐래. 앉기나 해.”
“징글징글한 자식. 커피나 줘라.”


윤에게도 익숙한 손님이었다. 육광이형이라고 불리는 화평의 친형과도 같은 손님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제 귀에 들린 충격적인 단어에 윤은 저도 모르게 육광을 쳐다보았다. 그런 윤과 눈이 마주친 육광도 익숙한 얼굴에 어색하게 웃으며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윤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벌벌 떨리는 손을 마주잡았다. 


“그래서 어디 갈거냐?”
“아유 그걸 아저씨가 알아서 뭐하시게요.”
“야 이놈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것도 못 물어봐? 하여간 은혜도 모르는 놈.”
“아유 요 근처에서 보기로 했어. 됐어?”
“좋은데 가야 하는데. 너 또 이상한 데 데려가는 거 아니지?”
“아유 진짜 알아서 한다니까 그래. 형이 하도 유난 떨어서 머리까지 했잖아. 이럴 거면 가 그냥”
“하여간 싸가지. 커피나 내놔 임마.”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길영도, 하림도 그리고 주변 손님들도 깔깔거리는데 윤만 웃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벌벌 떨리는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황급히 외투를 주워 입었다. 


“어, 가시게요?”


길영의 물음에 고개를 들어 길영을 쳐다 보자 얘가 왜 이래 하는 삐딱한 시선이 돌아온다. 


“어? 윤이씨 가요? 아니 커피는 마시지도 않고?”
“어, 그,”
“아! 급한 일 생기셨구나! 그렇다면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드려야쥐~”


눈치 빠른 하림이 타이밍 좋게 윤의 잔을 가져 가 테이크아웃 잔에 윤의 커피를 옮겨 담은 뒤 정신 없이 카드를 꺼내고 있는 윤에게 내밀었다.


“아유 손님 천천히 하세요.”


윤은 계산을 마치고 뒤에 쏟아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가게를 뛰쳐 나왔다. 찬 바람이 살을 에는 날씨에 아이스 음료를 들고 있었지만 손이 차가운 줄도 모르고 집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 와 소파에 털썩 앉으니 그제야 손에 온기가 돌면서 손 끝이 따끔거렸다. 


“아, 정말 왜 이러지.”


윤은 지난 날 자신의 연애를 떠올렸다. 그냥 차이기만 하면 양반이지 빌려준 돈 떼먹고 잠수는 기본이요, 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감정을 요리조리 살살 가지고 놀아 윤의 자존감을 갉아 없애버린 놈에 5분 대기조인 양 부려먹던 놈까지. 그 와중에 마음은 왜 그렇게 잘 주는지 그렇게 데여도 소위 말하는 금사빠를 못 벗어난 윤이었다. 


“윤화평씨…”


화평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또 다시 마음이 아려온다. 게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다 못해 자괴감까지 든다. 가장 최근 만났던 다정한 척 자신을 성욕 해소용 도구만도 못한 취급을 했던 인간까지 떠오르면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윤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소파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던 윤의 시선이 테이블에 펴 두었던 책에 닿았다. 


“어?”


뭔가 이상했다.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도 사 둔 반 고흐 도록(圖錄) 이 달리 보였다. 펴놓고 노려보면서 고민만 하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명암만 드러나던 그림이 달라졌다. 처음엔 그저 제가 볼 수 있는 색 중 가장 어두운 색, 소위 말하는 검정색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고흐 특유의 마티에르  때문인가 하고 윤은 책에 들어갈 기세로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아니었다. 분명히 다른 색이었다. 그림의 중심을 잡고 있는 거대한 산 모양의 형체가 분명 보던 색이 아니었다.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니 배경으로 그려진 산도 점점 다르게 보였다.


“이, 이게 왜…”


윤은 핸드폰을 집어 들어 유투브에 접속해 아무 영상이나 틀어보았다. 정말 달랐다. 제가 지금껏 봐온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떨리는 손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윤은 노트북을 열어 <색을 찾은 이들을 위한 지침서>를 주문했다. 모두가 색을 잃은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색을 찾은 사람들이 생겨 출판된 책이었다. 색을 명명하는 방법과 비슷한 계열의 색을 알려주는 책으로 판매율은 높지 않았지만 질병으로 인해 색을 잃기 전에 태어났던, 즉 날 때부터 색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 펴낸 책이라 색과 관련된 책 치고 인기가 높았다. 윤은 주문을 완료하고 다시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자신을 짓누르는 알 수 없는 피로감에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날 윤은 처음으로 색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무슨 색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둠을 닮아있었다.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세상과 닮았지만 조금은 다르고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색. 그럼에도 이상하게 안온한 기운을 내뿜는 색이 고흐의 그림 속 동그라미처럼 윤의 눈앞에서 소용돌이 모양으로 굽이쳤다.

몇 일 뒤 주문한 책이 오자마자 윤은 포장을 뜯고 책을 펼쳤다. 제가 늘 보던 느낌의 페이지들을 지나 평소와 다른 부분에서 멈추어 설명을 읽었다. 자신이 본 색은 남색이었다. 남색을 본 뒤에 차차 비슷한 계열의 색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며 파랑, 하늘, 코발트 블루, 아쿠아 마린 등의 색이 있다는 설명을 읽고 나자 윤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같은 페이지에 있던 비슷한 계열 색을 보여주는 색상표가 평소 보던 느낌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조금씩 느껴지기는 했다. 도대체 왜지. 왜 색이 보이는 거지. 윤은 낯선 느낌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핸드폰을 확인하고 마감이라는 현실을 마주한 윤은 가방을 챙겨 자신이 쫓겨나오듯 나왔던 화평의 가게로 향했다. 

딸랑-

“어서오세요-”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얼굴을 마주한 윤은 자신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화평의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여느 때처럼 부스스한 머리는 보던 색이었지만 화평의 얼굴, 정확히는 얼굴색이 매번 보던 느낌이 아니었다. 


“윤이씨?”


쟤가 왜 저래 하는 표정에 윤은 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왜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아니, 아니에요.”
“여기 메뉴판,”
“그, 그냥 먹던 거 주세요.”


누가 들으면 ‘늘 먹던 걸로’ 라고 들릴 법한 대사였지만 다급해 보이는 윤의 모습에 화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윤이 항상 먹는 브라질 원두를 계량컵에 담았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색이야.’


남색이라는 색을 본 뒤로 혹시나 다른 색을 볼지 몰라 윤은 항상 <색을 찾은 이들을 위한 지침서>를 가지고 다녔다. 윤은 책을 꺼내 또 한 번 달리 보이는 부분을 찾기 위해 빠른 손놀림으로 책장을 넘겼다. 살구색이었다. 원래는 살색이라고 불렀으나 인종에 따라 살의 색이 다르기에 살색이라고 칭하는 것은 인종차별적이라는 문제가 제기된 이후로 살구색이라고 표현한다는 설명이 나와있었다. 덧붙여 과일 살구의 사진도 같은 페이지에 수록되어 있었다. 


‘도대체 색이 왜 보이는거지.’


윤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목차 부분을 펼쳤다. 마지막 장, “당신에게 색이 찾아 온 이유”. 


‘여기다’


마지막 장을 펼친 윤은 자신이 밖에 나와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색이 찾아 온 이유, 다시 말해 당신이 색을 찾은 이유는 아직 확실하게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색을 찾는 경우는 우리의 감정과 관련되어 있어 시점과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나아가 사랑하는 감정을 느꼈을 때 색을 찾을 수 있다는 가설이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로 채택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일방적일 경우에도 색을 볼 수는 있지만 제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떠한 형태이든 특별한 관계가 형성된 후 그 관계가 지속될수록 볼 수 있는 색이 다양하고 풍부해진다고 위 가설은 주장합니다. 그 관계가 끝이 날 경우 바로 색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색이 점차 탁해지고 퇴색될 것이라는 주장도 덧붙였습니다. 위 가설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소위 연애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모두가 색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완전한 가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설명을 읽은 윤은 그제서야 몸에 힘을 풀고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화평씨를 좋아하는구나’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던 윤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실례합니다-”


항상 마시는 브라질 아이스 진하게. 컵을 내려 놓는 손의 색은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화평의 얼굴에서 보았던 색과 닮아있었다. 순간 윤은 알 수 없는 벅찬 마음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어어? 윤이씨 울어요?”


한가한 시간대라 손님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구라도 있었으면 당황한 화평의 목소리에 전부 윤을 쳐다 볼만큼 큰 목소리였다. 물론 오늘도 출근해 열심히 설거지를 하다 날벼락 맞은 하림은 예외였다. 


“여기 휴지요, 윤이씨. 윤이씨 왜 그래요.”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제 감정을 자각한 뒤에 보이는 색에 윤은 벅차면서도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그치지를 못했다. 이걸 어쩌나 하던 화평은 결국 윤의 손목을 잡고 스탭룸으로 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일단 여기 좀 앉아봐요 윤이씨.”


말이 스탭룸이지 의자 몇 개와 잡동사니를 담아 둔 리빙박스만 그득 한 공간이었다. 잠시 나가 따뜻한 물을 가져 온 화평은 윤에게 컵을 건넸다. 컵을 받아 들며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화평을 바라보자 색이 더 보인다. 머리카락이 그냥 어둠을 닮은 색이 아니었구나. 눈동자도 이런 색이었구나. 평소 보던 눈동자 색보다는 밝은 색인가보다 했는데 또 다른 색이었다. 


“화평씨 눈동자…”
“네?”
“눈동자가 빛나요… 예뻐요.. 그냥 좀 더 밝은 어둠이 아니었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입술을 모아가며 고민하던 화평이 어느 순간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윤이씨 색이 보여요? 색이 보이는 거구나.”


윤은 화평의 물음에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눈물을 방울 방울 떨구어냈다. 


“아유 참 왜 이렇게 울어요 정말.”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있다 윤의 앞으로 와 쪼그려 앉은 화평이 윤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윤의 얼굴에 따스한 화평의 손가락이 닿자 윤은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놀랐구나.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거둬지던 손을 윤은 저도 모르게 덥석 잡았다. 하지만 잡기가 무섭게 뿌리치듯 놓아버렸다.


“미안, 미안해요 사장님. 죄송해요. 내가.. 사장님.. 정말 미안해요.”


두서없이 사과를 늘어놓던 윤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스탭룸을 나섰다. 제 자리로 돌아 간 윤은 나와 있던 커피는 보지도 못하고 꺼내두었던 책을 미친 듯 담더니 가게를 뛰쳐나갔다.


“하림아 가게 좀!”


스탭룸에서 윤이 하는 광경을 보던 화평은 그런 윤을 쫓아 나서며 여전히 무슨 일인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하림에게 소리쳤다. 

같은 시각 가게를 뛰쳐 나간 윤은 가게에 들어서기 전보다 배는 더 화려해진 세상에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못 보던 심봉사가 눈을 떴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갈 길을 정하지도 못하고 갑작스런 찬 공기에 숨만 몰아 쉬며 가방 끈을 부여잡고 있는 윤의 손목을 누군가가 잡아챘다.


“윤이씨 어디 가요!”
“화평씨?”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어요? 어딜 그렇게 가요?”


색이 점점 더해지는 화평의 모습에 윤은 덜컥 겁이 났다. 겁이 나서 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을 마구 내뱉었다.


“화평씨, 제가 사장님을 좋아해요. 미안해요. 죄송해요.”


고백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윤이 화평의 손을 뿌리치곤 갑자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을 펄럭이며 달려가는 모습을 보던 화평은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에이 진짜!”


그리고는 소시 적 일 시키려는 할아버지를 피해 계양진 시골 마을 내달리던 솜씨로 윤을 쫓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소매치기라도 잡는 줄 알 것 같은 추격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폭탄을 날리고 도망치던 윤은 숨이라도 고르고자 잠시 멈추고 뒤를 본 순간 보인 화평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다시 내달렸다. 


“최윤씨! 야 최윤!”


평소라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왜 반말이에요’라고 쏘아 붙였을 텐데 그럴 정신도 없이 윤은 계속해서 달렸다. 습관이란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게 달리다 보니 어느 새 제 집 앞이었다. 집 대문 앞에 멈춰 서서 무릎을 붙잡고 숨을 몰아 쉬고 있자 어느 새 쫓아 온 화평이 자기를 툭 친다.


“아니, 헉, 왜, 도망을, 허억 아이고 죽겠다, 가고 그래요.”


윤은 그런 화평의 말에 대꾸할 힘도 없었다. 되려 무릎을 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져 삐끗하며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런 윤을 바라 보던 화평은 후우 크게 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몰아 쉰 화평은 다시 윤에게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윤의 볼이 얼굴색과는 다른 색이었다. 이게 빨강이었지. 화평은 제 집 거실 테이블에 두고 나온 윤이 읽던 지침서 속 글씨와 그림을 떠올렸다. 그리곤 추운 날씨에 뛰느라 발개진 볼을 양 손으로 꾹 쥐었다 놓았다. 아직까지 숨을 몰아 쉬느라 정신 없던 윤이 놀라 ‘지금 뭐하는 겁니까?’ 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모양새를 보고는 화평은 참나 하고 웃었다. 


“저도 좋아해요, 저도. 나는 커피콩 색부터 봤어요. 로스팅할 때 콩을 보는데 뭔가 다른 거야. 그래서 알았어요. 그거 말고는 안 보였어요. 그래도 커피콩 색이 구별이 되니까 요즘 커피 맛이 더 좋다고 손님들이 그러는 거에요. 근데 오늘 윤이씨 오고 나서 커피를 내리다가 가게를 한 번 보는데 손님들 옷 색이 막 보이는 거야. 그리고 윤이씨 우는 거 보다가 옆을 봤는데 우리 테이크아웃할 때 껴주는 그거 있죠 슬리브, 그것도 다르게 보이고. 아까 윤이씨 도망가는 거 잡으려고 뛰느라 제대로는 못 봤는데 거리가 계속 계속 달라지더라고? 나도 커피콩 색 본 뒤로 윤이씨가 아까 읽던 책 봤어요. 나도 윤이씨 좋아해서 색이 보이나봐.”


가만 가만 자기를 토닥이며 들려오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전하는 내용을 윤의 뇌가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윤은 더더욱 멍하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토끼 같네 하는 생각을 하던 화평은 다시 한 번 윤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응? 나도 우리 최윤 좋아해서 색이 보이나봐요.”


윤은 뭐라 뭐라 얘기하는 화평을 바라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뺀질뺀질하니 잘 생긴 얼굴을 바라보다 얘기하면서 움직이는 입술이 보였다. 이건 또 무슨 색이지. 


“최윤? 최윤! 뭐라고 말 좀, 웁-”


화평은 윤의 난데없는 입술박치기에 휘청이다 겨우 중심을 잡고 주저 앉은 윤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 손님 보기 보다 적극적이시네. 윤은 먼저 들이 댄 것이 무색할 정도로 능숙한 화평에게 잡아 먹히듯 키스를 당했다. 


“하아-”


화평은 숨을 몰아 쉬는 윤을 보다가 자신들이 길바닥에 주저 앉아 키스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저기 뭐야 최윤씨. 집이 요 근처에요? 그럼 좀 들어가는 게 낫겠는데.”


능청스럽게 웃는 모양새에 화악 얼굴을 붉힌 윤은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더니 계단을 올라 제 집 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윤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던 화평은 띠리릭- 하는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윤을 집으로 밀어 넣으며 입술을 맞댔다. 하지만 놀란 윤의 발과 현관문을 닫기 바쁜 화평의 발이 꼬이면서 둘은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키스 한 번 하다 뇌진탕 올 뻔 했네.”


개구진 화평의 말에 윤은 얼굴을 붉혔다.


“신, 신발이나 벗어요.”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선 윤은 제 집임에도 낯설다는 감정을 느꼈다.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닌 느낌. 내 집이 이런 색이었구나. 


“뭐해 최윤?”
“다 보여…”
“뭐?”
“색이 다 보여요 윤화평씨.”
“어 그러네. 최윤 집은 이런 색이었구나.”


둘은 놀이공원에 처음 간 어린 아이들처럼 우와 만 반복했다. 화평은 문득 자신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는 여전히 집 안 곳곳을 바라보고 있는 윤의 허리를 잡아 챈 뒤 입을 맞췄다. 그리고 침실이 있을 법한 곳으로 윤의 겉옷을 벗기며 움직였다. 어렵게 어렵게 침대에 도달한 뒤 윤을 침대에 눕히고 화평도 그 옆에 털썩 누웠다. 어쩌다 눈에 들어 온 침대의 색이 아는 색이었다.


“최윤은 베이지색 침대에서 자네.”
“어떻게 알아요?”
“나는 커피콩 색부터 보였으니까요. 커피콩 색이 갈색이라는 색이랑 비슷한데 그게 점점 연해지면 이런 색이 되거든. 이게 베이지래요.”


중얼중얼 설명을 하며 화평은 윤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윤에 제가 웃긴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데 싶어 바라보자 윤이 제 가슴팍을 쿡 찌른다.


“앞치마는 왜 하고 왔어요 윤화평씨”
“아, 그러네…”


뒷머리를 긁적이던 화평은 덩달아 푸핫 하고 웃어버렸다. 


“사장님, 좋아해요. 사랑해요 화평씨.”
“나도, 좋아해요. 좋아해 최윤.”


서로의 눈을 향하던 시선은 조금 아래 놓인 입술로 향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급하게 서로를 찾는 순간이었다. 

 

 

 

 


눈을 떠 보니 온통 어두웠다. 윤은 몸을 일으키려다가 뻐근하다 비명을 지르는 허리에 헉 하고 놀라며 다시 누웠다. 옆자리가 허전해 갑자기 불안해진 윤은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대충 이불을 두르고 희미한 불빛이 들어 오는 문 틈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부엌에서 뭔가를 달그락거리고 있는 화평의 모습이 보였다. 


“어, 깼네.”
“뭐해요?”

“아니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라. 가볍게 요기할 거 만들어요. 부엌 허락도 없이 써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윤은 낮게 웃으며 느리게 의자에 앉았다. 


“온 몸에 앵두가 있네.”


나무늘보처럼 움직여 앉는 윤을 흘긋 보던 화평이 한 마디 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지금 내 입술 색 보이지 않나?”
“보여요.”
“앵두라고 과일 있잖아요. 내 입술 색이랑 똑같거든. 근데 최윤 몸에 많잖아 앵두가.”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 윤은 얼룩덜룩한 자신의 몸 한 번, 바지만 입어 어떤 상황인지 너무도 잘 보이는 화평의 몸 한 번 번갈아 보았다. 그제서야 화평의 말을 이해한 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제는 꼭 사과 같네.”


사과를 명명하는 색의 이름은 몰라도 자신을 놀린다는 것은 확실히 이해한 윤은 발끈했다.


“윤화평씨!”
“알겠어, 알겠어. 아유 무서워 죽겠네. 얼른 드셔.”


파드득 화를 내는 윤을 보며 화평은 예의 능글거리는 말투와 함께 팬케이크를 담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분을 삭히며 팬케이크를 바라 보던 윤은 화평이 어느 샌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근데 왜 반말이에요?”
“안돼?”
“아니 지금,”
“사귀는 사이끼리 반말도 못해? 억울하면 최윤씨도 반말해~”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듯 뺀질거리는 동글동글한 얼굴을 홱 밀어버린 윤은 포크를 집어 들고 팬케이크를 한 입 조각 내어 입에 넣었다. 사귀는 사이라는 단어처럼 달콤하고 보기에도 예쁜 색이었다. 이건 무슨 색일까? 앞으로 알아갈 게 많다는 생각을 하는 윤이었다. 

 

 

 

 


에필로그, 그 이후의 이야기

이야기 하나

하림은 앞치마 휘날리며 뛰어 가는 화평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아니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그렇지 지금 자기만 두고 튄거야? 어이가 없다 못해 가출한 느낌. 


“사장님! 형! 야 윤화평!”


아이씨 저 인간이 아무리 사촌이래두 그릏지, 근무지를 이탈해? 화딱지가 나 앞머리만 휘휘 불며 가게 문 쪽을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린다. 노려 보던 시선을 거두고 영업 모드로 돌변한 하림.


“어서 오세요-”


들어 오는 손님과 눈이 마주 친 하림은 귓가에 종소리가 들리는 환청을 느꼈다.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와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오는 앞머리. 기타 가방을 잡고 있는 손가락에 칠해 진 매니큐어. 그리고 낭창한 허리. 와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
아니 잠깐 근데 쟤 얼굴색이 왜 저래. 옷은 또 왜 저래! 
뭐야 나 지금 색 보이는거야!?!?!?

이야기 둘

화평과 윤이 사귀기로 하고 3일 뒤, 화평은 뚜껑 열린다는 게 진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제 앞에 앉은 길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길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그 종이인형 같은 애랑 사귄다고?”
“아이 거 참 종이인형이 뭐야 남의 애인한테.”
“야 남자 좋아하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아니 나 바이긴 한데…”


화평이 나갔던 소개팅 자리는 친구가 화평의 가게에 갔다가 화평을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은 길영이 마련 한 자리였다. 그리고 오늘은 소개팅 중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 해 길영의 친구를 열 받게 한 화평을 추궁하는 자리였다.


“아니 그럼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너 때문에 걔한테 욕만 먹었잖아!”
“그 땐 몰랐지! 내가 윤이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게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아유 미안해요 미안해. 사과할게. 술 사잖아. 그러는 누나는 뭐 없어?”
“있긴 뭐가 있어, 여기 아무것도 없구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니까 아무도 없지.”
“이게 확. 맞고 싶냐?”
“아뇨, 맞고 싶지 않습니다.”
“어휴. 야 다음에 니 애인인지 종이인형인지 우리 도장 좀 데려와. 호신술 좀 가르치게. 야 누가 다리 걸면 다리 부러지겠더라.”
“아니 이 사람이. 내 애인 죽일 일 있어!?”
“이 새끼가!”

이야기 셋

“저건 뭐였지?”
“고동색이잖습니까. 나무 기둥 색. 공부 좀 하세요.”
“아유 나는 커피 공부만 좋아해. 그리구 어차피 최윤이 다 알려주잖어.”


데이트할 때마다 눈에 보이는 색의 이름을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화평과 윤이었다.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색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매일 새로이 나타나는 다채로운 광경에 밤을 새워가며 색 이름을 공부하곤 했다. 세상에 색이 사라진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박물관과 미술관은 전부 나라에서 운영 하게 되어 입장료가 저렴해 둘은 색도 볼 겸 자주 미술관에 들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번역한 책의 주인공 반 고흐의 작품 전시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둘은 미술관을 찾았다. 고흐 도록에서 봤던 그림이 자신의 눈 앞에 실제로 놓여 있다는 생각에 윤의 가슴이 벅차 올랐다. 화평의 손도 놓은 채로 그림을 보느라 여념이 없던 윤은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빈센트 반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라 적힌 설명을 읽은 윤은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파아랗게 눈부신 배경색과 가지마다 맺혀 있는 아름다운 꽃망울. 눈물이 날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는 윤 옆으로 화평이 스윽 다가온다. 


“최윤, 아몬드 나무 꽃 꽃말이 뭔지 알아?”
“몰라요.”
“진실한 사랑이래.”


느끼한 말에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고 화평을 바라보자 화평이 뭔가를 자 하며 내민다. 보석함이었다. 자신이 처음 본 색을 닮은 남색 보석함. 


“뭐해. 열어 봐.”


열어 보니 한 쌍의 반지가 있었다. 


“아니 뭐 프러포즈라기 보다는.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면 최윤한테 잔소리들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미술관에 사람도 없고 의미도 있는 공간이니까. 주고 싶었어 커플링. 이거 최윤이 처음 본 색인데 라피스라줄리라는 원석이래. 이거 질릴 때쯤 결혼반지로 바꿔줄게.”


조잘거리는 입술과 반지를 번갈아 보던 윤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 때 그 날처럼 먼저 화평에게 입을 맞췄다. 


“사랑해요 윤화평씨.”
“나도 사랑해, 최윤”

 

 

 

 


커피 향이 스며든 그 겨울의 고흐,
THE END

 

bottom.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