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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아이

​이사 (@K09180N)

평범한 아이였다, 나고 자란 곳이 평범치는 않았으나 아이는 유난히도 평범히 자랐고, 자랄 수 있었다. 소란스런 궁 속에서도,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목이 날아가던 진탕 속에서도 욕심이라곤 찾을 수 없는 순한 낯을 한 어미와, 그 어미를 빼다 박은 아이에게는 손이 닿지 않았다. 닿을 필요도 없었고. 곧게 자란 고운 아이, 정도껏 나이가 차면 어미와 함께 궁을 나가 편히 살고 싶다 미리 선언까지 해둔, 앞날엔 그저 그 익숙한 일상의 안온함과 평범함만 있을 것 같던, 그 아이는 한순간, 아비 어미를, 심지어는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형제를 모두 잃었다. 때때로 공기가 무거운 날은 있을지언정 매번 그 어떤 향도 품지 못하였던 궁 안에 처음으로 지독한 향이 돌았다, 그 지독한 풍경을, 어지러이 피어나는 비린내를 최윤은 견디지 못하고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최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혼란스런 눈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익숙히 걸치고 있던 하나의 얇은 천은 바닥을 나뒹굴고, 늘 고개를 처박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하였던 왕좌가 제 발아래에 있었다. 벌겋게 충혈되어 뿌예진, 짐승의 눈으로도 사람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 눈깔이 바삐 돌아다니는 사이 익숙한 낯을 한 자가 다가와 속삭이듯 말을 건네었다. 이제부터는 네가 왕 노릇을 하여야 한다고, 아이는 그제야 멍하니 허공을 향하던 눈깔을 제대로 된 곳으로 향하게 할 수 있었다, 익히 보던 그 의복은 제 몸 위에 입혀져 있었다, 방금 제 곁을 지난 자에게선 지독한 향이 났다, 처음 누군가 죽던 날 맡아보았던, 아주 지독한 것들에게서 풍기는 역겨운 것, 붉어졌던 눈앞이 천천히 원래의 색을 찾았다. 저자로구나, 속에서 삼켜진 생각은 천천히 대가리를 쳐들고서 똑똑히 그것을 보았다가, 똬리를 틀고서 그 안에 앉았다. 조용히 구석을 차지하고 야금, 야금 속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아니, 되려 비상했기에 어미는 그것을 숨기라, 작은 붓을 들고서 일러주었다. 아가, 너의 글을 숨기고, 입을 닫아라, 눈을 감고, 귀를 막아라, 대답하지 말거라, 새벽녘에 작게 우는 개구리에게도 짐을 미루는 궁이다, 아가, 소리를 내지 말거라.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진 눈은 언뜻 보기에도 선한 빛을 띠었고, 동시에 아주 새까만 것이 그 안에 소용돌이쳤다. 평범한 반응이었다, 천천히 등을 기댄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 어떤 자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 어떤 눈에서도 짙은 욕망만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 가의 기억처럼, 사람이라고 칭하기보다 그저 욕구의 껍데기라 칭하여도 괜찮은, 그것들이 미소를 지었고, 그 기억이 그림처럼 굳어 남는 순간에, 아이는 예의 그 기억을 지웠다, 살아야 했고, 살기 위해선 소리를 내면 안 됐다, 눈을 몇 번 옮겨 얼굴을 익히고, 피곤하단 말을 건네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우스웠다, 자꾸만 오르는 입꼬리를 가만히 두었다가 대신에 제가 고개를 숙였다. 몇 번 쓰러질 뻔한 몸을 간신히 옮겨 겨우 지내던 방에 당도할 수 있었다, 문이 닫히자 곧장 작은 함을 열었다. 들어있는 작은 종이를 손으로 잘 접어, 바로 앞의 연못에 지나가며 가볍게 던져버렸다. 있어 좋을 것은 없었다.

궁은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제아무리 썩어 빠졌다 하여도 이보다 어찌 더 할 수 있을까, 제 아래에 왕좌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저는 왕좌를 올려보고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그것은 너무도 달랐고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역겨운 향을 내었다, 제게 건네어지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품었다, 돌아가 제 자리에 앉았을 때에, 저는 몇 번이고 구역질해야만 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조금의 소리도 제게는 허락되지 않았고, 아주 작은 것에도 그들의 역겨운 숨결은 닿아야 했다. 너도 내 처지가 우스우냐, 어쩌다 궁 안에 날아들어 온 나비의 작은 날갯짓만이 어미의 말 아래서 저를 해방시켜 주었다. 지독히도 말라 비틀어져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도 그저 마른 나뭇가지를 보는 듯한 느낌까지 내는 손안에 쥐여진 것은 모두 허물일 따름이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조건에는 들어맞았을 것이다, 적당하고, 적당한, 나는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꽤 긴 시간을 어둠을 보고 살았다, 그 사이에 아주 조금의 비린내를 품은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새로이 궁에 든 자라고 하였다, 아주 작은 희망은 희미한 빛을 눈 안으로 들였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어둠을 찾았다. 똑같은 향, 순한 낯 위로는 얼핏 동정이 스쳤다, 그 하나가 무어라고 아이는 호기심을 품어 그 자의 시선을 좇았다, 천천히 흩어지는 그 끝을 제 시선의 끝에 맺으니, 이상히도 생경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가슴 어딘가가 저렸다, 누구라 하였지요, 곧 사그라들 듯한 목소리를 힘도 주지 않고 제 곁에 있는 자에게 내었다. 언제 사그라든다 하여도 이상치 않게, 잠시간 그자의 눈에 불안이 스쳤다, 그래, 네들의 입장에선 제가 허울뿐인 몸뚱이를 길게 두어주는 것이 좋겠지, 우습기도 우스운 처지에 자조 섞인 웃음을 낯 위로 품어내었다, 멍한 눈이 다시 그에게 닿자, 늦게서야 간사한 목소리가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윤화평, 작은 변방에서 자리를 지키던 무신, 지독한 냄새가 배어났지만, 처음으로 어떤 것도 담기지 않은 눈알을 보인 사내, 그래, 그에게선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경계해야 마땅한 꼴이었지만, 꽤 오래 홀로 서 있던 허수아비에게 처음으로 새 하나가 날아 앉는다면, 것을 반긴다 하여도, 굳이 나쁠 이유는 없었다, 그 날은 일찍이 자리를 나섰다.

손톱만 한 달이 겨우 빛을 내는 하늘 아래를 걸었다, 얇은 천이 바람과 닿으며 웅얼 이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 너도 그 꼴이 날게야, 하며 그저 서 있다가 흩날린 민들레 홑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와중에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였다. 그 시선이 닿는 곳은, 손목에 얼핏 삐져나온 나뭇가지의 끝, 눈을 한 번 끔뻑이고 손을 거두었다. 이 기이한 저주 또한 그들이 저를 고작 갈대로 엮인 이로 인식한 큰 이유였을 것이다, 맞닿은 시선을 피하지도, 곧 움직이는 것을 좇지도 않았다. 윤화평, 그 이름을 힘 있는 소리로 밀어내었다. 닿을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크게 몸을 움찔 인 자는 그 발을 천천히 제게로 움직였다. 나를 아느냐, 가까워진 낯에 물음을 던졌다. 저어지는 고개를 보고 느린 말을 이어낸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를 동정하느냐, 네게도 좋은 일일 터다, 속삭이듯 작게 새던 목소리는 분명 낮과 꼭 같았으나, 아마 눈앞의 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의 갈림이 제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웃음이 날 만큼 곧은 목소리가 꼭 어울리는 낯 밖으로 쫓겨났다, 작은 숨은 결국 웃음을 품고 한참을 어둠 위로 흩어졌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이상한 표정을 하던 윤화평은 눈을 빛냈다. 그자를 죽여다오, 그 빛은 꺼졌고, 낯에 한 번 품어진 웃음은 떠나지 않았다. 거절할 것이냐, 반쯤 확신에 찼던 목소리는 곧 사그라들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말 하나를 뱉고 가는 자 때문이었다.

궁은 또다시 뒤집혔다, 눈을 까뒤집고, 혀를 빼문 채 발견된 그자 덕에, 새어나는 웃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조용히 삼삼오오 흐트러지는 간사한 인간들의 뒤를 파고들었다. 어떤 이는 순응했고, 어떤 이는 소리를 질렀으며, 어떤 이는 칼을 빼 들었다. 물론, 제게 닿은 칼끝은 곧 그의 목을 꿰뚫을 따름이었다, 내 그 지독한 시간들을 어찌 썼을 것 같으냐, 울컥, 차올라 뱉어지는 피를 보며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눈을 감았다, 보름도 지나지 않아 뱀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 모두 꼬리가, 혀가 잘렸다. 대가리만이 남았다. 윤화평은 허물만 남은 뱀의 대가리들에게 몇 번을 물렸으나, 그저 낡은 허물들의 삐걱이는 소리로 들렸을 터였다. 

눈을 한 번 끔뻑이고, 그를 불렀다. 윤화평, 작은 소리에 들린 낯은 늘 그렇듯이 순한 빛을 띠었다. 내게 연정을 품었느냐, 가만히 공간을 도는 물음에도 한참을 대답을 않던 그는 잠시 눈을 감더니, 작지도, 크지도 않은 소리로 짧은 답을 내었다. 고개가 기울어졌다. 너는, 내가 더럽지 않느냐, 예상치 못한 말인 듯 둥그렇게 커지는 눈을 한참이나 들여보았다, 그럴 연유도 없다는 말을 뱉던 그를 가만히 보며, 잠시 망설이다, 뒤로 몸을 돌려 걸치고 있던 얇은 천을 그대로 툭, 떨궈내었다. 등을 한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어깨와 팔뚝까지 타고 내려온 나뭇가지, 그 위를 가득 메운 색색의 꽃송이들, 어지러이 얽힌 것들을, 그 눈앞에 그대로 드러내었다. 연유가 될 것이다, 충분한, 그러지 않는 것이 네게, 내게도 좋을 것이다. 말은 뱉었으나 이유 없는 행동이었다, 저조차도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마음 한편엔 두려움마저 고개를 빼꼼히 쳐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곧 돌아나가겠지, 드문 일이긴 했으나 분명 알 것이다, 이유 역시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웅크려 입을 틀어막던 순간에도 내 사람이 필요했고, 그들의 감정이 필요했다. 한기를 느끼고,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뒤를 볼 생각도 못 한 채 다시 옷을 주워들었다. 순간에 닿아오는 온기는 충분히 저를 놀라게 했으나 것을 또 채 티는 내지 못하였고,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하던 몸은 거친 손이 고개를 돌려, 그 입술이 닿을 적까지 제 울음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입을 닫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라, 대답하지 말고 그대로 돌아 궁을 나가라, 다신 찾지 않을 테니, 어딘가에 숨어 살아라, 너희의 소리가 내게 닿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는 지금과 같은 일은 겪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보지 못하게 될 것이며, 듣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리할 것이다. 가거라, 떠나 영영 나타나지 말아라, 누구도 너희의 소리를 알지 못하게 하여라.

윤, 화, 평, 곧게 쓰인 글자가 참 저답다고 생각했다. 적막이 어딘가를 짓누르는 와중에도 순간만은 빗겨 지나칠 수 있었다, 궁을, 나를 지켜라, 윤화평은 조용히도 그 낯에 미소를 품었다. 아이의 마른 손 끝엔 작고 붉은 꽃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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