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흉(Scar)
쉐뇨 (@sueno_de_sueno)
대대로 성년체로도 건강하고 우수한 피스틸을 출산하고 양성하기로 인정받는 최씨 집안의 월례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번 월례회는 다음 대의 피스틸로 기대되는, ‘케일릭(피스틸이나 스테먼으로 형질이 나뉘기 전 미성년의 상태)의 시기를 막 끝낸 19살의 윤이 어떤 형질로 발현되었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
1년 전 장남의 대에 태어난 3명의 아이 중 피스틸로 발현되는 자녀가 단 하나도 없어, 차남인 윤의 아버지가 대를 이어 가기로 해 파장이 있었다. 가장 큰 권력은 집안의 명맥을 이어갈 피스틸로의 발현 가능성이 있는 케일릭이 있는 집안에 있다. 윤의 큰아버지 내외와 사촌들은 어떠한 이의도 없이 수긍할 수 밖엔 없었다.
위험한 것은 아직 케일릭시기의 자녀가 둘이나 있는 작은 아버지의 가족들이다.
윤이 피스틸로 발현된다면 이후 어떠한 형질을 가졌다 한들 집안 최고의 권한에선 열외다.
가문의 이름 안에 사는 것, 그 재력을 누리는 것은 동일할 지라도 작은 아버지의 욕심은 늘 어떤 것을 원하는지 누구도 가늠하기 어렵다.
본가로 가는 차 안. 윤은 아버지(모체/남성체/피스틸)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 각성통에 시달리는 몸을 쉬었다.
각성통과 함께 첫 단추가 열린 셔츠 사이로 윤의 목선을 따라 짙은 색을 띄는 나무의 가지가 새겨져 어제보다 더 도드라진다. 그런 윤이 안쓰럽기도, 자랑스럽기도 한 아버지는 두 손을 모아 윤의 손을 꼭 쥐고 깊은 기도를 했다.
"성자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그리스도님, 언제나 이 아이와 함께 하소서. 악한 사탄이 탐하지 아니하도록 보호하시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 별과 같이 빛나는 주님의 자녀로 살게 하소서."
숨 막히게 높은 담을 오른쪽으로 두고 있는 긴 진입로를 거쳐 대문에 다다랐다.
각성통 중에도 윤은 따스하게 내리 쬐는 겨울 햇살이 좋은 지 내리는 것을 돕는 아버지에게 오랜만에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윤이가 아주 잘 자랐네요."
작은 아버지가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가장 먼저 나와 윤의 일가를 맞이했다.
윤의 아버지는 작은 목례로 작은 아버지의 반려인 스테먼에게 인사를 건네고 동생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의 아이들도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랐구나."
동생을 닮은 두 쌍둥이 형제를 무심한듯 하면서도 유심히 훑어본 윤의 아버지는 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우리 쌍둥이들이 각성통을 앓고 있어요 형님."
각성통, 자신의 아이들이 피스틸이란 것을 알리는 동생의 목소리가 공격적으로 들린 것은 기분 탓인가?
그 말에 윤의 아버지는 다시 그들을 돌아보았다. 윤의 성년을 축하하기 위한 날인 오늘. 회의장도 들어서기 전에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 아이들도 오늘부터 윤이가 받을 피스틸 교육에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윤이는 몸이 약하니, 모두가 걱정이었는데 가문의 업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윤이 피스틸로 발현한 것은 모체인 본인 밖에 모르는 일인데 어떻게 동생의 귀에 이렇게나 빨리 들어간 것인지. 윤의 아버지는 그나마 웃는 상을 지었던 표정이 어그러졌다.
작은 아버지는 윤에게 의미 모를 미소를 띄우고 자신의 일가를 이끌고 윤과 아버지의 걸음을 제쳐 본가의 문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훗날 윤의 아버지는 후회한다.
동생의 아이들이 피스틸이란 것을 알았던 그 직후 회의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적어도 그날 회의의 마지막, 대를 이을 피스틸 적자 교육 참여 서약에 서명하지 않았더라면...
윤이 그렇게 행방불명이 되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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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겨울의 마지막 발악인 꽃샘추위로 언 땅을 소리 없는 봄비로 안아 주는 날이다.
강력반은 이른 조회 직후 출동 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납치, 감금, 매춘에 집단 내 살인도 의심된다는 끔찍한 사건을 어제 새벽까지 덜미를 잡은 것이다.
이제 막 신참으로 들어온 화평은 선배들 속에서 침 삼키는 소리도 못 내고 가는 중이다.
밤 낮 할 것 없이 화려하고 사람 많은 대학가의 유흥거리를 비집고 들어가느라 애를 먹자 조수석에 탄 반장이 차 지붕 위로 사이렌을 켜 올렸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화평이 깜짝 놀라자 차 안의 선배들이 정적을 깨고 낄낄 웃었다.
"아휴~ 현장에 시신이 없길 기도해라~ 우리 막내 가서 우는 거 아니야? 토하고 울고 토하고 울고?"
사수인 봉상이 본인의 사건수첩을 검토하면서도 짓궂게 긴장한 화평을 찔벅거렸다.
그리고 화평과 마주 앉은 한 참 선배인 육광은 "마누라 넷째 낳아 육아 휴직한 이전 막내는 취미가 K1에 공포 살인 영화도 눈 하나 꿈쩍 안 한다고 큰소리쳐 놓고 출근 첫날 졸도했지 아마."하며 있는 얘기에 없는 얘기를 조금 더 보태 겁을 준다.
"저는 딱! 사건만 본다 구요. 딱! 수사할 땐 제가 감정이 없어요. 감정이!"
누가 조금이라도 얕잡아 볼까 눈에 불을 켜며 호언장담이다.
그 사이 출동차량은 범인들이 은신하며 매춘을 자행한다는 5층짜리 상가건물 근처로 은밀히 주차했다. 반장은 무전기를 허리춤에 차며 지시명령을 확인시킨다.
"이 새끼들 두목이 새벽에 건물로 들어갔다는 보고다.
우리는 그 대가리가 늘 머문다는 2층의 복도 맨 끝 207호로 들어간다. 207호 바깥 창문 쪽에 둘 건물 입구에 둘 건물 침투조가 넷으로 움직인다. 구조상 옆에 206호와 같은 방인데 가벽을 만들어서 둘로..."
반장의 말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 갑자기 ‘쾅!’하고 건물 안에서 폭발음이 들려온다.
비명과 함께 건물 안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출동차에서 내린 이들은 소방구조 요청을 넣고 작전 조 그대로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큰 불이 아닌 단발의 폭발음. 2층 206호로 예상되는 창문이 깨지며 파편들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본다면 강력반의 목표물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간 침투조는 속히 복도 끝 207호로 향하며 폭발이 일어난 206호를 경계했다.
206호의 철문은 안쪽의 폭발로 문의 위쪽이 날아가 연기를 내 뿜고 있었고 207호는 창고처럼 간단한 철문에 걸쇠로 잠겨져 있었다. 화평은 사수에게 눈짓으로 싸인을 받고 가지고 온 해머로 207호 철문의 걸쇠를 내리치고 문을 걷어차고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참혹한 광경.
사방을 새하얀 타일로 둘러진 방 단 하나의 병실침대에 사지가 쇠사슬에 나신으로 묶인 남자.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짙은 꽃들의 향기와 그 향을 내는 수십여종의 꽃이 남자의 온몸을 뒤덮어 새겨져 있었다.
“도...도와주세요.”
피해자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뜨지 못한 채 가쁜 숨이 섞인 신음과 함께 겨우 목소리를 냈다.
등 뒤에서부터 뻗친 가지를 따라 몸 앞쪽으로 가득 매워진 수십가지의 꽃들이 새겨진 헐벗은 몸은 공포의 한기로 오랫동안 떨었는지 핏기없이 가냘펐다.
“곧 구조대가 와요. 이제 안심해요.”
화평은 입고 일던 점퍼를 벗어 윤의 앞섶을 서둘러 덮어주었다.
윤과 몸이 가까워졌을 때 훅 끼쳐오는 그의 샐 수 없는 꽃향기에 숨이 막혔다.
그 동안의 치욕이 그대로 몸에 새겨진 피스틸. 너무나 잔인한 삶이다.
“화평아-구조대 도착했나 확인해- 206호에 화상환자가 있어! ”
먼저 206호로 간 육광이 소리치자 207호에 있던 나머지 두 형사들도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화평은 구조대가 왔는지 살피기 위해 윤을 향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순간 윤은 가까이 있던 화평의 소매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화평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힘으로 화평을 당기자 의미를 알아듣고 화평이 윤의 입가로 귀를 기울였다.
“제 이름... 제 이름은 최윤이예요. 경찰도 믿을 수 없어요.... 벌써 다섯번째 경찰에게 적발되었지만… 전 아직도 이렇게....”
말 끝이 흐려지면서도 잡은 화평의 옷깃은 더욱 꽉 쥐는 윤.
상처투성이인 입술을 꾹 다문 윤은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고 정신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화평은 이 상황에 본인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팡질팡하고 마음을 잡지 못한다.
사건을 진술해 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피해자를 숨긴다면 그 두목의 꼬리는 어떻게 잡을 것인가?
윤이 계속된 경찰의 묵인에 구조되지 못하고 이곳에 감금되어 있던 것이라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뭘까?
“저를 숨겨주세요. 제발...”
최윤이 의식을 잃기 전까지도 화평은 답을 내지 못했다.
윤은 구조차량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 내에서도 은밀히 작게 마련된 1인실에서 주치의 진찰과 치료가 모두 극비에 붙여지도록 입원을 요청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화평은 병실에 환자복이 입혀져 있는 윤을 보고 있자 하니, 그의 살갗에 새겨져 있던 수많은 흔적들이 옷 위로 다시 도드라져 올라오는 듯해 눈을 질끈 감았다.
“죽기 직전에 건져왔군요.”
주치의는 윤에게 놓은 수액공급을 점검하며 윤의 곁에서 괴로운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앉은 화평에게 말했다.
“재력가들 사이에 보통의 피스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쾌락의 경지를 맛보게 해 준다는 열락나무종의 피스틸이구요.”
“열락나무요?”
“열락나무종의 피스틸과의 잠자리는 다른 피스틸과 차원이 다르다고 해 비싼값에 거래되지 않습니까.”
“사람을 사고 파는게 그렇게 흔합니까?”
“순진한건지 무지한건지... 그 흔해빠진 범죄도 모르고 어떻게 형사가 되셨는지... 아 모를 수도 있겠네요. 아주 최상위층만 암암리에 거래되는 사실이니까요.”
화평은 의사가 건네는 차트에 보호자서명을 해 돌려준다.
“이 환자처럼 이런 바닦에서 희생되는 열락나무종의 피스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고귀한 분들의 반려인 피스틸들 또한 열락나무종이니까요.”
하늘과땅 아니 천국과 지옥처럼 느껴지는 의사의 말에 화평은 오싹함을 느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의사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가져온 차트를 챙겨 병실문을 나섰다.
“아, 열락나무종은 자신을 품은 스테먼 수대로 꽃들이 몸을 수 놓지요.
그리고 희생양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열락나무 피스틸은 늘 관계에 해갈을 느끼니까요.”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린 의사의 눈이 윤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의 모습을 훑는다. 그리고 화평에게 맞춰지는 시선. 빙긋 웃는 얼굴에서 서늘함이 느껴진다.
"단 한번만 더 다른 스테먼에게 몸을 내어 줬더라면 꽃이 숨통까지 새겨져 죽었을 거라고 알려드리는 겁니다.”
자신이 스테먼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 이성에겐 무지한 화평은 주치의의 말에 윤을 다시 한번 돌아봤다.
“윤형사님 퇴근해-”
당직이라 집에서 잘 쉬다 나온 동기가 병실안으로 들어오며 얼이 빠진 화평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어-하며 주치의의 말에 혼란했던 정신을 주워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또 최윤의 병원으로 이른 출근을 해야 하는 화평의 머릿속이 복잡하다.
온몸에 꽃이 뒤덮혀 목숨까지 위협받다니...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욕정을 채우려고 하룻밤을 사다니.
최윤에게 그런짓을 한 추악하고 더러운 스테먼들을 꼭 잡아쳐 넣겠다고 다짐하는 화평이다.
그런데 그 의사 어떻게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걸까. 일개 작은 병원의 의사이면서 그렇게 세세한 내막까지... 그 의사 복사꽃향이 짙은 스테먼이었다. 혹시 그 의사도 연루된 범인일까.
‘단 한번만 더 다른 스테먼에게 몸을 내어 줬더라면 꽃이 숨통까지 새겨져 죽었을 거라고 알려드리는 겁니다.’
환자인 윤을 취하려들진 않을까?
화평은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에 이불을 차고 일어나 나갈준비를 하는둥 마는둥 부랴부랴 나가 차에 시동을 걸곤 윤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속력을 내기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달리는 차가 느려지는 것만 같은 화평은 병실을 지키고 있는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걸리던 신호음이 지금은 받을 수 없다는 알림으로 넘어갔다.
“왜 받질 않는거야 왜!”
그 사이 도착한 병원 엘리베이터도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 올라간다.
병실 앞에는 예상대로 보초서던 형사는 없고 병실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그것은 보고 더욱더 불안해진 화평은 숨도 돌 리지 않고 달려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화평의 등장에 놀란듯한 윤이 소리를 지를 뻔한걸 간신히 참았다.
“혀...형사님 이 밤에 왜 오셨어요?”
대답을 하려던 화평은 지금 대답을 하고 말고할 시간이 없다며 윤의 손목에 링거바늘을 빼고 가져온 코트를 덮어씌웠다.
“나가는 겁니다. 여기도 위험해요.”
윤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고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요... 정말... ”
화평은 절룩이는 윤을 부축해 비상구로 몸을 숨겨 병원 밖으로, 관할 밖으로 또 더 먼 곳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속보입니다. 지난해 2월 자신의 사촌형제인 스테먼 을 유혹해 상해를 입히고 도주 중이던 피스틸 최씨가 어제 오전 적발 된 피스틸 성매매의 업주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에 더불어 피해자인척 경찰의 보호를 받다가 또 다시 도주했는데 이번에는 보호를 담당했던 형사까지도 함께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고있습니다.”
어디론가 멀리 향하는 고속버스 뒷자리. 라디오에선 속보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몸을 숨긴 윤과 긴장이 풀려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잠든 화평이 앉아있다.
그리고 윤은 화평의 손을 붙들고 기도한다.
“주님, 저의 목마름이 이분으로 채워지도록 도와주세요.”
- 흉(Scar) -